mms://114.108.183.196/movie/20110307lecture01.mp3강의 녹취는 강영수자매님께서 정리하신 것입니다.
1기에 이런 노력봉사 지체가 있어서 참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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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종교개혁 때 어떻게 성서을 이해하고 해석하는지가 이번 강좌의 주 목적이다. 이번 강의는 주로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 본 성서해석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 6가지 성서 해석학의 특징
1. 자기 해석적 성서
2. 그리스도 중심주의
3. 구약과 신약
4. 성령과 말씀
5. 회중의 해석학
6. 순종의 해석학
★ 들어가면서
여기에 정리되어있는 내용들이 21세기 한국교회에 도전이 되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나뱁티스트의 성서 해석학은 당시 16세기 많은 종교 해석학자들과 함께 발전했다. 중세 유럽의 여러 가지 사회변화와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인쇄술의 발전을 통해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던 상황의 변화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개혁의 환경을 제공했고 그것의 한 부분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성서해석학도 확대되고 성장했다. 당시의 개혁자들은 성서적 인물들이었다. 그렇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이 당시의 개혁자들보다 더 열정을 가지고 성서를 바라봤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교회든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성서를 읽고 암송하고 실천하는 것에 적극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 해석학적 특징중에 성직자로부터 성경을 듣는 것에서 넘어서 스스로 토론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함께 시간을 갖으면서 성서를 이해하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종교 개혁가들과 아나뱁티스트 사이에는 여러가지 논쟁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신구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성령과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교회 회중들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런데 개혁가들이 논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역사적으로는 아나뱁티스트들을 탄압하게 된다. 유럽에 종교개혁에 성공한 자들에 의해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해석학은 묻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아나뱁티스트 성경해석보다 일반 종교 개혁 성서해석이 더 지배적이게 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아나뱁티스트 성경해석학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대안적 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 성서 해석학은 신학자나 교수나 대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개인들(교육받지 못한) 심지어 감옥에 있었던 아나뱁티스트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다. 당시에 개혁자들에 비교하면 아나뱁티스트들은 가난했고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좋은 환경에서 성서해석학이 발전된 것은 아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신자들과 비슷했다. 당시 권력자들의 강압에 있었기 때문에 그 강압 속에서 독특하게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발전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말씀에 의해 따라 살다가 죽어간 아나뱁티스트들에 의해, 이들의 성서해석학은 독특한 형태로 교회사와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다른 종교 개혁가들과는 다르게 콘스탄틴 황제 이후로 있었던 국가와 교회의 결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당대의 캐톨릭과 개신교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기독교 국가주의를 기초로 한 교회들과는 다른 성서해석학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국가 혹은 체계 속에서 교회와 신학과 성서해석학은 발전해왔는데 아나뱁티스트 성서해석학은 이와는 다르게 매우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래서 그 후로 오늘날 후기 크리센덤 교회를 열망하는 교회들에게는 이러한 독특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해석학이 나름의 의미가 있다.
1. 자기 해석적 관점
성서는 자기 해석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1529년 아들러(Clemens Adler)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자체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될 수 있고 아주 분명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추가적 설명없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최초의 아나뱁티스트의 순교자인 Felix Mantz는 자기가 남긴 글에서 본인이 확신하기로는 말씀은 그 스스로가 자유롭게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간과하거나 초과할 수 없다. 즉 그 말이 굉장히 분명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재판을 받을 때 스스로 증언하기를 성서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하는데 유일한 자료는 성경이라고 했다. 재판과정의 마지막 증언에서(유아세례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재판) 유아세례는 불필요하고 성인세례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쳐준 것이지 누가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마태복음 11장 25절 말씀처럼 아나뱁티스트들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주 단순한 사람들에게 성서는 해석될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다고 믿었다. 성서의 많은 작가들은 아주 평범하고 많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 한명이었던 Menno는 그의 논쟁의 대상이었던 Gellius와 함께 논쟁 중에 이런 말을 했다. 마태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어떠한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Balthasar Hubmaier라는 당시의 아나뱁티스트 중에서는 가장 많이 교육을 받은 신학자도 예수님도 목수였고 많이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서는 단순함의 원칙을 지켰다고 말했다. 성서 말씀 중에는 상당히 애매하고 모호하고 어려운 문장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성서가 다른 성서의 부분에 의해서 서로 도와주면서 해석이 가능하다. 성서 중에는 굉장히 어렵고 심오한 내용이 많아서 이해하기 어렵지만(일치되지 않는 부분들 모순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풀기 위해서 작은 부분들이 서로 합쳐지고 결국에는 큰 그림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치 작은 초들이 합쳐져서 나중에 큰 불이 되는 것처럼 성경은 그렇게 한 그림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중요시 여겼던 것은 성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주어진 상황을 잘 이해하고 성서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서를 바라볼 때 성경의 전, 앞으로 성경이 진행될 상황 전체를 보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어떤 말씀을 전후 맥락에서 떼어놓고 본다면 (상황에서 분리해서 본다면)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른 context안에서 본다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Dirk Philips, 아나뱁티스트 초기 지도자 중 한명은 성경을 볼 때 한두개의 말씀만 떼서 보는 것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성서를 이해할 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의 작은 말씀이 전체적인 문장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왜곡되고 다르게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작은 문장들은 전체 성경을 이해하는데 근거로서 이용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2. 그리스도 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아나뱁티스트 성서 해석학의 매우 중요한 key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오한 것이나 어려운 것을 분명하게 하는 key이다. 초기 아나뱁티스트인 Hans가 말하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지고 온 것이 때문에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말하는 성경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구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100% 받아들이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신 것이 가르침의 완전성을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바라봐야한다고 했다. 당시 종교 개혁가들도 예수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성서를 이야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개혁가들이 중심으로 삼았던 것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의 원칙에 맞추어서 그리스도론을 펼쳤다. 따라서 종교 개혁가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었던 것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종교 개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충돌되는 부분에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럴 때는 구약에 있는 부분을 인용해서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은 맹세와 전쟁에 대한 부분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구약을 인용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란 것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무게로 본 것이 아니다. 신약을 구약보다 좀 더 강조해서 보았고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복음의 핵심으로 봤기 때문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더 큰 무게가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에 대한 몇가지 비슷한 sign이나 모양들이 구약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런데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적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되고 있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향해서 진행되고 있고 신약은 직접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생명과 권세의 근원이 되는 예수그리스도, 교회의 머리로써 교회의 기초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성서를 이해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 중에서도 복음서가 핵심이라고 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이 거기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해석학에 있어서의 첫 번째 질문은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로 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 아나뱁티스트들의 특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은 강령이나 교리적인 부분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예수그리스도중심적인 성경해석은 모든 성경이 이신칭의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당시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거부한 것이다. 모든 성경은 이신칭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르침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나 관계 또는 그의 계획하심에 맞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음서가 바로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복음서가 가장 중요한 성서(Canon)였다. 당시 아나 뱁티스트들은 종교 개혁가들이 초점을 두었던 교리적 이해나 전제적 이론(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한다)보다는 성서의 주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형성 거기에 더 중요한 초점을 두었다. 교리적이거나 이신칭의처럼 무엇으로 인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전제적 이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것 자체가 복음서의 핵심이라 여겼다. 독일어에서 누구를 따르다는 의미에서 성서 해석학의 핵심이 되는 제자도가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중요한 key word가 되었다. 이런 이해 때문에 당시 종교 개혁가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을 의심했는데, 구원자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기 보다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가 아니고) 선한 행위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들은 선한 행위로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을 향해 행위는 하지 않고 믿음만 강조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문스터 사건(The Munster disaster)은 아나뱁티스트 역사 중에 가장 어두운 부분이었다. 문스터 도시에 모여 있던 아나뱁티스트 그룹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도시를 차지하고 나쁜 결과들을 가져왔던 사건이었다. 그 당시 문스터 도시에 있던 아나뱁티스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신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고 구약적인 관점에서 사건이 발생되었고 1년 정도를 정부군과 대치하면서 그 도시를 하나님이 재림할 도시로 선포하고 여러 가지 죄악들을 범하게 되었다. 모든 시민들이 죽게 된다. 이 사건 때문에 교회사나 유럽의 역사 속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은 위험하고 종말론적이고 급진적인 세력으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3. 구약과 신약
신약과 구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종교 개혁가들과 아나뱁티스트들의 강도 높은 쟁점) 콘스탄틴황제 이후로 기독교 국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말씀을 많이 인용했었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약에 근거해서 나오는 주장들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논쟁을 벌였다. 초기 스위스 형제단에서 Thomas Muntzer에게 썼던 편지에서 신구약에 대한 입장을 표현했다. 거기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놨는데 그 중에는 신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구약에서는 세상적 관점에서 씌여진 것이 많이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씌여진 것을 받고 있기 때문에 두 개를 비교해서 볼 때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1538년에 Bern Debate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 대해서 금하지 말라고 한 것은 지키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계명에 대해서는 신약에 동의되는 범위내에서 지키겠다고 헸다. Hubmaier가 츠빙글리(스위스 개혁자)와의 논쟁에서 할례를 통해서 유아세례를 정당히 하려는 츠빙글리에 대해서 그것은 구약에서 나와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믿는 이들을 세례한다. 구약의 할례와 관련해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세례를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세례는 신약에 근거한 의식이다.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신약적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과 구약 사이의 불일치성 또는 불연결성에 대해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일치성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다. Dirk Philips는 진정한 성서 해석자라면 신약과 구약 사이에서 오는 구분 또는 서로의 차이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겠지만 동시에 신구약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기본적인 일체성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독일의 아나뱁티스트인 Pilgrim Marpeck은 구약은 집을 지을때의 터와 같고 신약은 그 집 자체로 형상화했다. 집의 기초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집과 기초는 각각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신구약에 관련해서 결정적인 성구가 산상수훈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의 가르침(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약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후터 라이트가 모라비안 정부에게 1545년에 쓴 편지에 보면 성경에는 전쟁을 치루는 것에 대해서 몇가지 인용문이 나오고 있는데 다윗왕과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치루었지만 구약의 때에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이나 다른 어떤 신실한 사람들에게 전쟁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은혜의 시대에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은 금지된 것이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시대에 있었던 법칙 즉 원수를 미워하고 갚으라고 했던 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금지된 것이었다. 그래서 구약은 가치가 있지만 한정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말씀의 영감으로 된 것이 분명하지만 신약에서처럼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구약에 나오는 많은 상징과 비유에 대해서는 리해하고 배울 필요가 있지만 이것을 이해하고 적용할 때는 새롭게 바뀐 환경, 새로운 메시지인 신약에 의해서 해석 적용되어야 한다.
4. 영성(성령)과 말씀
종교개혁당시 성령과 말씀의 관계는 성서 해석학의 중요한 이슈중의 하나였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 자체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성령께서 어떻게 이 성서해석에 도움을 주실지에 대해 생각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위험을 경고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성경를 이해함에 있어서) 어떻게 이해했을까? 아나 뱁티스트들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했다..그러나 그리스도와 성령을 경험하는 것과 이신칭의가 똑같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했지만 성령의 능력에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해했다. Menno는 기독교의 삶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탄생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성경에 헌신적으로 매달릴 수 있다면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오직 성서로만 이해될 때 가능한 것이다. Dirk Philips의 책에 의하면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에 힘을 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고 이야기한다.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성서을 이해하는데 성령이 도와주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Hans, 초기 지도자 중 한명은 교리화된 신앙(이신칭의)은 단순히 교리적 전제조건을 충족하면 된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고 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 마음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변화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아나뱁티스트들은 회중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사모했다. 초창기 모라비안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에 한사람인 Christian Entfelder는 이렇게 교회를 정의했다. 교회는 선택되고 구원받고 정화된 하나님이 사는 그룹인데 이 사람들에게는 성령님께서 선물로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맡긴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배워지고 경험되고 증거되고 판단되는 모든 것들은 말씀되어진 성경이나 씌여진 성경들인데 이것들은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성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형성되어 가는데 성령님이 각 멤버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훈련되어지고 키워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키워진다고 했다. 초기 기독교 그룹의 성장에서 초대 리더쉽들은 분명히 성령의 임재하심에 따라 카리스마한 리더쉽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학자적인 훈련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재하시는 능력에 따라 나타났다. 예를 들면 Adrian Corneliss같은 사람은 성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해석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혔었는데 “우리는 라틴대학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복음의 학교에서 기쁘게 참여해서 성령을 선생으로 모시고 성서를 배웠다”고 했다. 주장(성서를 잘못 해석했다고 감옥에 갇힌 자가 주장한 말) 아나 뱁티스트들의 성서 해석발전에 있어서 성령과 말씀해석의 관점은 매우 중요했다. 말씀과 성령사이에서의 논쟁 때 두 개가 다 똑같이 중요하게 논의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5. 회중의 해석학
아나 뱁티스트들은 성서 해석에 있어서 교회 안 회중 안에서 함께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이해하는 기독교인은 완전히 헌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모든 회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열려져 있었다. 개인이 개인 스스로 해석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6. 순종의 성서 해석학
그 어떤 이유나 어떤 해석이나 지식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순종이다.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 해석학은 이상적이고 급진적이었다. 이들은 캐톨릭 교회와 개혁주의자들의 전통적 성서 해석학에 도전했다. 그 도전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수천명의 아나뱁티스트들이 죽임을 당했다. 개혁자들과 캐톨릭이 승리했기 때문에 그들의 성서 해석학이 교회에 주류로 남아있다. 메노나이트 후터 라이트 아미쉬들에 의해 성서해석학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전통주의 율법주의 세상적 가치에 의해 아나뱁티스트 성서 해석학은 약화되어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아나뱁티스트 성서해석학에 대한 관심과 조명이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기에 이런 노력봉사 지체가 있어서 참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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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종교개혁 때 어떻게 성서을 이해하고 해석하는지가 이번 강좌의 주 목적이다. 이번 강의는 주로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 본 성서해석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 6가지 성서 해석학의 특징
1. 자기 해석적 성서
2. 그리스도 중심주의
3. 구약과 신약
4. 성령과 말씀
5. 회중의 해석학
6. 순종의 해석학
★ 들어가면서
여기에 정리되어있는 내용들이 21세기 한국교회에 도전이 되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나뱁티스트의 성서 해석학은 당시 16세기 많은 종교 해석학자들과 함께 발전했다. 중세 유럽의 여러 가지 사회변화와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인쇄술의 발전을 통해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던 상황의 변화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개혁의 환경을 제공했고 그것의 한 부분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성서해석학도 확대되고 성장했다. 당시의 개혁자들은 성서적 인물들이었다. 그렇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이 당시의 개혁자들보다 더 열정을 가지고 성서를 바라봤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교회든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성서를 읽고 암송하고 실천하는 것에 적극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 해석학적 특징중에 성직자로부터 성경을 듣는 것에서 넘어서 스스로 토론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함께 시간을 갖으면서 성서를 이해하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종교 개혁가들과 아나뱁티스트 사이에는 여러가지 논쟁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신구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성령과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교회 회중들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런데 개혁가들이 논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역사적으로는 아나뱁티스트들을 탄압하게 된다. 유럽에 종교개혁에 성공한 자들에 의해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해석학은 묻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아나뱁티스트 성경해석보다 일반 종교 개혁 성서해석이 더 지배적이게 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아나뱁티스트 성경해석학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대안적 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 성서 해석학은 신학자나 교수나 대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개인들(교육받지 못한) 심지어 감옥에 있었던 아나뱁티스트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다. 당시에 개혁자들에 비교하면 아나뱁티스트들은 가난했고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좋은 환경에서 성서해석학이 발전된 것은 아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신자들과 비슷했다. 당시 권력자들의 강압에 있었기 때문에 그 강압 속에서 독특하게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발전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말씀에 의해 따라 살다가 죽어간 아나뱁티스트들에 의해, 이들의 성서해석학은 독특한 형태로 교회사와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다른 종교 개혁가들과는 다르게 콘스탄틴 황제 이후로 있었던 국가와 교회의 결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당대의 캐톨릭과 개신교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기독교 국가주의를 기초로 한 교회들과는 다른 성서해석학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국가 혹은 체계 속에서 교회와 신학과 성서해석학은 발전해왔는데 아나뱁티스트 성서해석학은 이와는 다르게 매우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래서 그 후로 오늘날 후기 크리센덤 교회를 열망하는 교회들에게는 이러한 독특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해석학이 나름의 의미가 있다.
1. 자기 해석적 관점
성서는 자기 해석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1529년 아들러(Clemens Adler)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자체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될 수 있고 아주 분명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추가적 설명없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최초의 아나뱁티스트의 순교자인 Felix Mantz는 자기가 남긴 글에서 본인이 확신하기로는 말씀은 그 스스로가 자유롭게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간과하거나 초과할 수 없다. 즉 그 말이 굉장히 분명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재판을 받을 때 스스로 증언하기를 성서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하는데 유일한 자료는 성경이라고 했다. 재판과정의 마지막 증언에서(유아세례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재판) 유아세례는 불필요하고 성인세례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쳐준 것이지 누가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마태복음 11장 25절 말씀처럼 아나뱁티스트들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주 단순한 사람들에게 성서는 해석될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다고 믿었다. 성서의 많은 작가들은 아주 평범하고 많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 한명이었던 Menno는 그의 논쟁의 대상이었던 Gellius와 함께 논쟁 중에 이런 말을 했다. 마태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어떠한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Balthasar Hubmaier라는 당시의 아나뱁티스트 중에서는 가장 많이 교육을 받은 신학자도 예수님도 목수였고 많이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서는 단순함의 원칙을 지켰다고 말했다. 성서 말씀 중에는 상당히 애매하고 모호하고 어려운 문장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성서가 다른 성서의 부분에 의해서 서로 도와주면서 해석이 가능하다. 성서 중에는 굉장히 어렵고 심오한 내용이 많아서 이해하기 어렵지만(일치되지 않는 부분들 모순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풀기 위해서 작은 부분들이 서로 합쳐지고 결국에는 큰 그림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치 작은 초들이 합쳐져서 나중에 큰 불이 되는 것처럼 성경은 그렇게 한 그림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중요시 여겼던 것은 성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주어진 상황을 잘 이해하고 성서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서를 바라볼 때 성경의 전, 앞으로 성경이 진행될 상황 전체를 보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어떤 말씀을 전후 맥락에서 떼어놓고 본다면 (상황에서 분리해서 본다면)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른 context안에서 본다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Dirk Philips, 아나뱁티스트 초기 지도자 중 한명은 성경을 볼 때 한두개의 말씀만 떼서 보는 것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성서를 이해할 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의 작은 말씀이 전체적인 문장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왜곡되고 다르게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작은 문장들은 전체 성경을 이해하는데 근거로서 이용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2. 그리스도 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아나뱁티스트 성서 해석학의 매우 중요한 key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오한 것이나 어려운 것을 분명하게 하는 key이다. 초기 아나뱁티스트인 Hans가 말하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지고 온 것이 때문에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말하는 성경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구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100% 받아들이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신 것이 가르침의 완전성을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바라봐야한다고 했다. 당시 종교 개혁가들도 예수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성서를 이야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개혁가들이 중심으로 삼았던 것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의 원칙에 맞추어서 그리스도론을 펼쳤다. 따라서 종교 개혁가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었던 것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종교 개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충돌되는 부분에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럴 때는 구약에 있는 부분을 인용해서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은 맹세와 전쟁에 대한 부분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구약을 인용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란 것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무게로 본 것이 아니다. 신약을 구약보다 좀 더 강조해서 보았고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복음의 핵심으로 봤기 때문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더 큰 무게가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에 대한 몇가지 비슷한 sign이나 모양들이 구약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런데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적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되고 있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향해서 진행되고 있고 신약은 직접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생명과 권세의 근원이 되는 예수그리스도, 교회의 머리로써 교회의 기초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성서를 이해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 중에서도 복음서가 핵심이라고 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이 거기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해석학에 있어서의 첫 번째 질문은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로 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 아나뱁티스트들의 특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은 강령이나 교리적인 부분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예수그리스도중심적인 성경해석은 모든 성경이 이신칭의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당시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거부한 것이다. 모든 성경은 이신칭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르침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나 관계 또는 그의 계획하심에 맞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음서가 바로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복음서가 가장 중요한 성서(Canon)였다. 당시 아나 뱁티스트들은 종교 개혁가들이 초점을 두었던 교리적 이해나 전제적 이론(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한다)보다는 성서의 주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형성 거기에 더 중요한 초점을 두었다. 교리적이거나 이신칭의처럼 무엇으로 인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전제적 이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것 자체가 복음서의 핵심이라 여겼다. 독일어에서 누구를 따르다는 의미에서 성서 해석학의 핵심이 되는 제자도가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중요한 key word가 되었다. 이런 이해 때문에 당시 종교 개혁가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을 의심했는데, 구원자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기 보다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가 아니고) 선한 행위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들은 선한 행위로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을 향해 행위는 하지 않고 믿음만 강조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문스터 사건(The Munster disaster)은 아나뱁티스트 역사 중에 가장 어두운 부분이었다. 문스터 도시에 모여 있던 아나뱁티스트 그룹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도시를 차지하고 나쁜 결과들을 가져왔던 사건이었다. 그 당시 문스터 도시에 있던 아나뱁티스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신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고 구약적인 관점에서 사건이 발생되었고 1년 정도를 정부군과 대치하면서 그 도시를 하나님이 재림할 도시로 선포하고 여러 가지 죄악들을 범하게 되었다. 모든 시민들이 죽게 된다. 이 사건 때문에 교회사나 유럽의 역사 속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은 위험하고 종말론적이고 급진적인 세력으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3. 구약과 신약
신약과 구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종교 개혁가들과 아나뱁티스트들의 강도 높은 쟁점) 콘스탄틴황제 이후로 기독교 국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말씀을 많이 인용했었다. 그래서 아나뱁티스트들은 구약에 근거해서 나오는 주장들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논쟁을 벌였다. 초기 스위스 형제단에서 Thomas Muntzer에게 썼던 편지에서 신구약에 대한 입장을 표현했다. 거기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놨는데 그 중에는 신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구약에서는 세상적 관점에서 씌여진 것이 많이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씌여진 것을 받고 있기 때문에 두 개를 비교해서 볼 때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1538년에 Bern Debate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 대해서 금하지 말라고 한 것은 지키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계명에 대해서는 신약에 동의되는 범위내에서 지키겠다고 헸다. Hubmaier가 츠빙글리(스위스 개혁자)와의 논쟁에서 할례를 통해서 유아세례를 정당히 하려는 츠빙글리에 대해서 그것은 구약에서 나와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믿는 이들을 세례한다. 구약의 할례와 관련해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세례를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세례는 신약에 근거한 의식이다.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신약적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과 구약 사이의 불일치성 또는 불연결성에 대해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일치성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건 아니다. Dirk Philips는 진정한 성서 해석자라면 신약과 구약 사이에서 오는 구분 또는 서로의 차이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겠지만 동시에 신구약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기본적인 일체성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독일의 아나뱁티스트인 Pilgrim Marpeck은 구약은 집을 지을때의 터와 같고 신약은 그 집 자체로 형상화했다. 집의 기초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집과 기초는 각각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신구약에 관련해서 결정적인 성구가 산상수훈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약의 가르침(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약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후터 라이트가 모라비안 정부에게 1545년에 쓴 편지에 보면 성경에는 전쟁을 치루는 것에 대해서 몇가지 인용문이 나오고 있는데 다윗왕과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치루었지만 구약의 때에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이나 다른 어떤 신실한 사람들에게 전쟁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은혜의 시대에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은 금지된 것이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시대에 있었던 법칙 즉 원수를 미워하고 갚으라고 했던 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금지된 것이었다. 그래서 구약은 가치가 있지만 한정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말씀의 영감으로 된 것이 분명하지만 신약에서처럼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구약에 나오는 많은 상징과 비유에 대해서는 리해하고 배울 필요가 있지만 이것을 이해하고 적용할 때는 새롭게 바뀐 환경, 새로운 메시지인 신약에 의해서 해석 적용되어야 한다.
4. 영성(성령)과 말씀
종교개혁당시 성령과 말씀의 관계는 성서 해석학의 중요한 이슈중의 하나였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성서 자체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성령께서 어떻게 이 성서해석에 도움을 주실지에 대해 생각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위험을 경고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성경를 이해함에 있어서) 어떻게 이해했을까? 아나 뱁티스트들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했다..그러나 그리스도와 성령을 경험하는 것과 이신칭의가 똑같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했지만 성령의 능력에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해했다. Menno는 기독교의 삶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탄생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성경에 헌신적으로 매달릴 수 있다면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오직 성서로만 이해될 때 가능한 것이다. Dirk Philips의 책에 의하면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에 힘을 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고 이야기한다.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성서을 이해하는데 성령이 도와주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Hans, 초기 지도자 중 한명은 교리화된 신앙(이신칭의)은 단순히 교리적 전제조건을 충족하면 된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고 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 마음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변화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아나뱁티스트들은 회중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사모했다. 초창기 모라비안 아나뱁티스트 리더 중에 한사람인 Christian Entfelder는 이렇게 교회를 정의했다. 교회는 선택되고 구원받고 정화된 하나님이 사는 그룹인데 이 사람들에게는 성령님께서 선물로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맡긴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배워지고 경험되고 증거되고 판단되는 모든 것들은 말씀되어진 성경이나 씌여진 성경들인데 이것들은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성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형성되어 가는데 성령님이 각 멤버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훈련되어지고 키워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키워진다고 했다. 초기 기독교 그룹의 성장에서 초대 리더쉽들은 분명히 성령의 임재하심에 따라 카리스마한 리더쉽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학자적인 훈련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재하시는 능력에 따라 나타났다. 예를 들면 Adrian Corneliss같은 사람은 성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해석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혔었는데 “우리는 라틴대학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복음의 학교에서 기쁘게 참여해서 성령을 선생으로 모시고 성서를 배웠다”고 했다. 주장(성서를 잘못 해석했다고 감옥에 갇힌 자가 주장한 말) 아나 뱁티스트들의 성서 해석발전에 있어서 성령과 말씀해석의 관점은 매우 중요했다. 말씀과 성령사이에서의 논쟁 때 두 개가 다 똑같이 중요하게 논의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5. 회중의 해석학
아나 뱁티스트들은 성서 해석에 있어서 교회 안 회중 안에서 함께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이해하는 기독교인은 완전히 헌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모든 회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열려져 있었다. 개인이 개인 스스로 해석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6. 순종의 성서 해석학
그 어떤 이유나 어떤 해석이나 지식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순종이다.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의 성서 해석학은 이상적이고 급진적이었다. 이들은 캐톨릭 교회와 개혁주의자들의 전통적 성서 해석학에 도전했다. 그 도전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수천명의 아나뱁티스트들이 죽임을 당했다. 개혁자들과 캐톨릭이 승리했기 때문에 그들의 성서 해석학이 교회에 주류로 남아있다. 메노나이트 후터 라이트 아미쉬들에 의해 성서해석학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전통주의 율법주의 세상적 가치에 의해 아나뱁티스트 성서 해석학은 약화되어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아나뱁티스트 성서해석학에 대한 관심과 조명이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