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내가 아나뱁티스트를 만난 해요 알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그래서 차근차근히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싶었습니다.
소박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대화의 문을 여는 데까지는 이르렀으나
대화다운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함께 나누려 했던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일단 접어둡니다.
그대신,그중에서 정작 하고싶었던 이야기,
오랜 대화의 시간이 지난 뒤, 마지막무렵에 나누려던 이야기를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하겠습니다.
..............
나는 도처에서 아나뱁티스트가
기독교의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의문을 함께 지녀왔습니다.
감동이라 함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처음 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아나뱁티스트의 순수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의문이라 함은 처음 아나뱁티스트가 택한 대상,
아나뱁티스트가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알고 선택한 모델 때문이었습니다.
왜 아나뱁티스트는 예수와 그 제자들이 다 떠난 뒤의 모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으로 예배한 '종교화'된 2차적 모델을 예수운동의 원형으로 삼았을까?
왜 아나뱁티스트는 곧바로 예수에 의해 이끌어지는 예수생존시의 예수운동을 모델로 삼지 않은 것일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일과 예수를 믿는 일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까닭인즉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선배로부터 전해받은 가르침에 따르기 마련입니다.
요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기독교의 전통적 가르침, 그 대단한 권위, 신성불가침의 신조의 위력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것은 초대교회라는 말 속에 가려져 있는 진실, 일종의 혼동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 그리스도인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예수와 하나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떠나, 그 주위를 맴돌고 있으며 그런 사실조차 모르기 일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 자신의 생각, 예수자신이 보여준 믿음은 제쳐두고 권위있는 사도나 제자들의 말을 따르는 일일까요.
아니면, 예수의 생각, 믿음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믿으며 따르는 일일까요,
아무리 위대한 예수의 제자, 위대한 예수의 사도의 생각, 가르침,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대체로 엇비슷하기는 할지라도 예수자신의 생각, 가르침, 믿음과는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사람들은 예수를 전하는 사람,
가령 그리스도의 사도를 자칭하는 바울의 생각과 신앙을 따르면서
예수의 생각, 예수의 신앙으로 혼동하며 예수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잡아온, 그 수많은 바울 서신의 어느 쪽이든 펼쳐서 읽어보십시오.
바울만큼 예수를 사모하며 예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분, 따르고 있는 분은 예수가 아닙니다.
그가 부르고 있는 이름은 그리스도, 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와는 전혀 다른 신격화된 새로운 존재입니다.
하나의 예수는 바울에 이르면 예수와 그리스도, 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확실하게 2분화됩니다.
바울이 의지하고 있는 분은 예수가 아닙니다.
갈릴리에서 인간미 물씬 풍기면서 농어민들과 어울리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많은 편지 내용의 어느 곳에서도 갈릴리 예수의 말이나 행적은 한 구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바울의 출발점은 갈릴리의 예수가 아니라, 환상속에 만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추앙되어 온 바울 편지를 밑받치고 있는 유일한 것이 다메석의 환상이란 말입니다.
바울이 세운 거대하고 웅장한 성곽, 2천년동안 기독교의 주춧돌과 대들보노릇을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없는 기독교, 그것은 결코 오늘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일어난 현상이 아닙니다.
2천년 전, 오로지 바울의 환상, 바울의 꿈 위에 기독교가 새로 생겨날 때분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현상입니다.
기독교란 이름 아래, 예수는 사라지고, 그대신 예수그리스도라는 오로지 영성만 강조하는 신령이 태어난 것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기독교의 고유한 교리로 주장되어 온 것들의 거의 모두가
당시 중동지역에 널리 유포되고 있었던 타종교의 교리들에서 차용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믿고싶지 않은 일이지만 학자들은 속속 이런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이같은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 한다면
사람들이 알고 있고 , 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의심없이 믿어왔던 기독교신앙이란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명확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새로 창조된 우상에게 절하는 신앙체계속에 실종된 예수를 다시 찾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속에서 우상으로 화석화된 예수그리스도 대신, 살아 숨쉬는 예수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체제종교에서 삶으로,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운동으로, 일대 격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아나뱁티스트도 예외는 아닌듯 합니다만)은
유감스럽게도 원래의 예수의 생각, 예수의 믿음을 가지려고 끝까지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훔모하며 갖게 된 위대한 제자나 사도들의 제2차적 생각이나 믿음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처음교회를 사모하며 따르고자 하는 여러분의 숭고한 열정은
그 역사 속에 방금 이야기한 이같은 문제를 고민하며 잠못 이루던 밤들이 있었던가를...
..........
2천년 기독교사를 돌아보면,
아니, 성경을, 그중에서도 복음서만 돌아보더라도
그 안에는 마치 큰 저수지처럼 서로 상반하는 다양한 생각의 갈래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는
그중의 어떤 것은 정통이며
그밖의 것은 이단이라 제거하는 인위적인 교리통일작업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예수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는 그 작성 연대가 각각 다른데
시간이 경과할수록 마가와 같은 처음 복음서은 어렸을 때의 기사조차 보이지 않음에 비하여
뒤로 갈수록 처음에는 없었던 내용들이 추가되어, 나중에는 예수의 인격은 신격화하기에 이릅니다.
예컨대 복음서중에 가장 늦게 나온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탄생 이전의 엄청난 우주적 탄생설화가 덧붙여져
전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으며
그 빛이 세상에 오셔서 비추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이같은 서술은 다름 아닌 예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간단히 줄여 말하면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야기입니다.(요1:1-11)
그와같은 생각은 바로 예수자신의 생각이라고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요한은 마치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영원한 분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같은 복음속에서 요한은 예수에 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요5:19)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아가서 하나님잉과 동시에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지하며 믿고 따르는 자라는 상반된 주장을 함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긴 이야기는 줄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에수중심'도 중심 나름입니다.
흔히 '예수중심'의 공동체로 알고 있는 초대교회는
예수중심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사람들 내지 그 지도자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들의 영적 지도자로, 하나님으로 예배드리는 '종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예수를 본받아, 예수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중지하고
그대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깨닫고 따르는 기쁨 대신, 예수에게 엎디어 절하는 신앙의 열정으로 변한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몸과 생명을 돌보지 않는 예수의 동역자가 되는 대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우상숭배자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하고는 삼척동자도 먼저 알아보는 허망한 짓이 21세기 갱명천지에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신격화라는 이러한 생각의 변화 내지 신앙은
먼 훗날, 곧,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황제주제하의 니케아회의에 의해서 확정되기에 앞서,
예수께서 세상을 뜨신 후, 수십년이 지났을 때 만들어진 복음서 안에 이처럼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다 맞다거나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생각이 예수의 생각과 일치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쨋던 예수의 시대와 그 뒤의 시대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어찌하여 아나뱁티스트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열정을
'예수 생존시의 예수운동'에서 찾지 못하고, 예수에 의해 직접 이끌어진 예수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바을 등에 의해, 이미 '종교화된 초대교회'를 그 모델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처음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루터를 비롯한 여타의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그 이상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처음사람들처럼 위대하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루지 못한 일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더욱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내 물음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처음 아나뱁티스트가 채택한 믿음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여깁니까?'
아니면, ' 그들이 미처 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일을 마저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십니까?'
내가 고민하며 계속 고삐를 늦추지 못하고 있는 대목도 바로 이점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아무리 개혁해도 기성의 종교의 틀안에서만 움직여야 되는 것인가,
예수운동,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기성종교의 틀까지 넘어서는, 더욱 새로운 것인가?
그리하여 기독교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타종교들과도 얽혀있는 근본적인 갈등의 요인들,
나아가서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새로 다가오는 새시대의 문을 열며
인도할 수 있는 비전을 아나뱁티스트는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런 물음을 기탄없이 드릴 수 있는 까닭은
아납뱁티스트는 적어도 무조건 반대하거나 거부하려 하지 않고
함께 고민하면서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전통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나뱁티스트는
아무리 시대에 앞서서 신앙의 첨단을 살아온 위대한 전통을 가졌다하더라도
기성의 업적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더 온전한 진실을 향해 전진하는 이들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밝아오는 2013년은 이같은 물음에 대하여 무엇인가 대답할 수 있는,
세계 도처에서 힘있게 동트고 있는 새로운 빛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는 해가 되길 소망하며
주안에서 회원 모두가 새롤 태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차근차근히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싶었습니다.
소박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대화의 문을 여는 데까지는 이르렀으나
대화다운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함께 나누려 했던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일단 접어둡니다.
그대신,그중에서 정작 하고싶었던 이야기,
오랜 대화의 시간이 지난 뒤, 마지막무렵에 나누려던 이야기를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하겠습니다.
..............
나는 도처에서 아나뱁티스트가
기독교의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의문을 함께 지녀왔습니다.
감동이라 함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처음 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아나뱁티스트의 순수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의문이라 함은 처음 아나뱁티스트가 택한 대상,
아나뱁티스트가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알고 선택한 모델 때문이었습니다.
왜 아나뱁티스트는 예수와 그 제자들이 다 떠난 뒤의 모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으로 예배한 '종교화'된 2차적 모델을 예수운동의 원형으로 삼았을까?
왜 아나뱁티스트는 곧바로 예수에 의해 이끌어지는 예수생존시의 예수운동을 모델로 삼지 않은 것일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일과 예수를 믿는 일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까닭인즉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선배로부터 전해받은 가르침에 따르기 마련입니다.
요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기독교의 전통적 가르침, 그 대단한 권위, 신성불가침의 신조의 위력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것은 초대교회라는 말 속에 가려져 있는 진실, 일종의 혼동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 그리스도인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예수와 하나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떠나, 그 주위를 맴돌고 있으며 그런 사실조차 모르기 일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 자신의 생각, 예수자신이 보여준 믿음은 제쳐두고 권위있는 사도나 제자들의 말을 따르는 일일까요.
아니면, 예수의 생각, 믿음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믿으며 따르는 일일까요,
아무리 위대한 예수의 제자, 위대한 예수의 사도의 생각, 가르침,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대체로 엇비슷하기는 할지라도 예수자신의 생각, 가르침, 믿음과는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사람들은 예수를 전하는 사람,
가령 그리스도의 사도를 자칭하는 바울의 생각과 신앙을 따르면서
예수의 생각, 예수의 신앙으로 혼동하며 예수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잡아온, 그 수많은 바울 서신의 어느 쪽이든 펼쳐서 읽어보십시오.
바울만큼 예수를 사모하며 예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분, 따르고 있는 분은 예수가 아닙니다.
그가 부르고 있는 이름은 그리스도, 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와는 전혀 다른 신격화된 새로운 존재입니다.
하나의 예수는 바울에 이르면 예수와 그리스도, 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확실하게 2분화됩니다.
바울이 의지하고 있는 분은 예수가 아닙니다.
갈릴리에서 인간미 물씬 풍기면서 농어민들과 어울리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많은 편지 내용의 어느 곳에서도 갈릴리 예수의 말이나 행적은 한 구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바울의 출발점은 갈릴리의 예수가 아니라, 환상속에 만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추앙되어 온 바울 편지를 밑받치고 있는 유일한 것이 다메석의 환상이란 말입니다.
바울이 세운 거대하고 웅장한 성곽, 2천년동안 기독교의 주춧돌과 대들보노릇을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없는 기독교, 그것은 결코 오늘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일어난 현상이 아닙니다.
2천년 전, 오로지 바울의 환상, 바울의 꿈 위에 기독교가 새로 생겨날 때분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현상입니다.
기독교란 이름 아래, 예수는 사라지고, 그대신 예수그리스도라는 오로지 영성만 강조하는 신령이 태어난 것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기독교의 고유한 교리로 주장되어 온 것들의 거의 모두가
당시 중동지역에 널리 유포되고 있었던 타종교의 교리들에서 차용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믿고싶지 않은 일이지만 학자들은 속속 이런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이같은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 한다면
사람들이 알고 있고 , 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의심없이 믿어왔던 기독교신앙이란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명확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새로 창조된 우상에게 절하는 신앙체계속에 실종된 예수를 다시 찾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속에서 우상으로 화석화된 예수그리스도 대신, 살아 숨쉬는 예수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체제종교에서 삶으로,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운동으로, 일대 격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아나뱁티스트도 예외는 아닌듯 합니다만)은
유감스럽게도 원래의 예수의 생각, 예수의 믿음을 가지려고 끝까지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훔모하며 갖게 된 위대한 제자나 사도들의 제2차적 생각이나 믿음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처음교회를 사모하며 따르고자 하는 여러분의 숭고한 열정은
그 역사 속에 방금 이야기한 이같은 문제를 고민하며 잠못 이루던 밤들이 있었던가를...
..........
2천년 기독교사를 돌아보면,
아니, 성경을, 그중에서도 복음서만 돌아보더라도
그 안에는 마치 큰 저수지처럼 서로 상반하는 다양한 생각의 갈래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는
그중의 어떤 것은 정통이며
그밖의 것은 이단이라 제거하는 인위적인 교리통일작업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예수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는 그 작성 연대가 각각 다른데
시간이 경과할수록 마가와 같은 처음 복음서은 어렸을 때의 기사조차 보이지 않음에 비하여
뒤로 갈수록 처음에는 없었던 내용들이 추가되어, 나중에는 예수의 인격은 신격화하기에 이릅니다.
예컨대 복음서중에 가장 늦게 나온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탄생 이전의 엄청난 우주적 탄생설화가 덧붙여져
전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으며
그 빛이 세상에 오셔서 비추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이같은 서술은 다름 아닌 예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간단히 줄여 말하면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야기입니다.(요1:1-11)
그와같은 생각은 바로 예수자신의 생각이라고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요한은 마치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영원한 분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같은 복음속에서 요한은 예수에 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요5:19)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아가서 하나님잉과 동시에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지하며 믿고 따르는 자라는 상반된 주장을 함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긴 이야기는 줄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에수중심'도 중심 나름입니다.
흔히 '예수중심'의 공동체로 알고 있는 초대교회는
예수중심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사람들 내지 그 지도자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들의 영적 지도자로, 하나님으로 예배드리는 '종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예수를 본받아, 예수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중지하고
그대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깨닫고 따르는 기쁨 대신, 예수에게 엎디어 절하는 신앙의 열정으로 변한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몸과 생명을 돌보지 않는 예수의 동역자가 되는 대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우상숭배자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하고는 삼척동자도 먼저 알아보는 허망한 짓이 21세기 갱명천지에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신격화라는 이러한 생각의 변화 내지 신앙은
먼 훗날, 곧,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황제주제하의 니케아회의에 의해서 확정되기에 앞서,
예수께서 세상을 뜨신 후, 수십년이 지났을 때 만들어진 복음서 안에 이처럼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다 맞다거나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생각이 예수의 생각과 일치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쨋던 예수의 시대와 그 뒤의 시대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어찌하여 아나뱁티스트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열정을
'예수 생존시의 예수운동'에서 찾지 못하고, 예수에 의해 직접 이끌어진 예수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바을 등에 의해, 이미 '종교화된 초대교회'를 그 모델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처음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루터를 비롯한 여타의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그 이상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처음사람들처럼 위대하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루지 못한 일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더욱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내 물음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처음 아나뱁티스트가 채택한 믿음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여깁니까?'
아니면, ' 그들이 미처 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일을 마저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십니까?'
내가 고민하며 계속 고삐를 늦추지 못하고 있는 대목도 바로 이점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아무리 개혁해도 기성의 종교의 틀안에서만 움직여야 되는 것인가,
예수운동,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기성종교의 틀까지 넘어서는, 더욱 새로운 것인가?
그리하여 기독교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타종교들과도 얽혀있는 근본적인 갈등의 요인들,
나아가서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새로 다가오는 새시대의 문을 열며
인도할 수 있는 비전을 아나뱁티스트는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런 물음을 기탄없이 드릴 수 있는 까닭은
아납뱁티스트는 적어도 무조건 반대하거나 거부하려 하지 않고
함께 고민하면서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전통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나뱁티스트는
아무리 시대에 앞서서 신앙의 첨단을 살아온 위대한 전통을 가졌다하더라도
기성의 업적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더 온전한 진실을 향해 전진하는 이들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밝아오는 2013년은 이같은 물음에 대하여 무엇인가 대답할 수 있는,
세계 도처에서 힘있게 동트고 있는 새로운 빛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는 해가 되길 소망하며
주안에서 회원 모두가 새롤 태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깊이 심겨진 씨앗일수록
그 싹이 돋아나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것을 배웠습니다.
텃밭 앞에 주저 앉아, 이제나 저제나 언제 씨앗이 그 모습을 보일까 애태우다가
씨앗을 땅속에서 파내는 어리석은 농부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생명은 반드시 그것이 숙성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생명은 시간과 함께 자란다는 것을,
그래서 생명은 믿음속에, 기다리는 기쁨을 안겨준다는 것을 다시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