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던 것은 비폭력인가 폭력인가?
왜 요더는 예수의 전적인 비폭력을 입증하려 노심초사하는가?
요더는 먼저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눅19:47)는 대목에 주목하여
이 사건은 예수가 성전관할권을 주장하는 자로서 '성전을 상징적으로 접수한 사건'이라 말한다.
이것은 영적인 가르침에만 익숙한 신자들에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놀라운 사회변혁운동자의 안목이다.
나아가, 요더는 '이 성전 청결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질서에 반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이었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예수를 체포하려는 음모에 대한 합법적 구실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나
예수의 대적자들은 그러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요더는 예수의 행동이 질서에 반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만일 그게 사실이었다면 얼마든지 체포하여 처형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체포하지 못한 것은 구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막11:18)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알지 못한 것은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눅19:47-48)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던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은
밤이 되면 물러났지만 군중이 사실상 성전을 계속 점령하고 있었다.
그 한 가운데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와 군중들의 힘은 막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속에서 평소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예루살렘 대성전 마당에서
예수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요2:15)
이같은 문제 앞에서, 요더를 비롯하여 평화주의자들은
예수는 성전 청결 사건에서 결코 어떤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예수의 비폭력을 강하게 옹호하며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요더의 말에 따르면 채찍을 휘두른 것은 양과 소 등 짐승들이며
사람을 겨눈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더라도, 짐승에 대한 것은 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어찌 그뿐인가.
예수는 복음서의 여러곳에서 언어폭력을 서슴치 않고 있음을 보게된다.마태복음 23장 거의 전면에 걸쳐
예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요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언어폭력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것이 원래 예수가 한 말 그대로의 것인지,
복음서기자들의 손끝에서 변질된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예수는 결백하다고, 예수에겐 아무 흠도 업다고 주장하는 일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당시의 성전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을 폭력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예수를 폭력과 비폭력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난폭한 사람으로 만들뿐이다.
차라리 정직하게 그 폭력성을 받아들이고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요더는 이때의 상황을 ‘한걸음만 더 나가면 상황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그래서 로마군 요새로 진격할 수 있는 쿠데타 직전의 ‘절호의 기회’임에도
뒤로 물러선 것은 ‘이제 그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라 한다.(87쪽)
그러나 이것은 쿠데타를 일으킬 ‘절호의 기회’가 아니다.
이때 모인 군중들의 열기와 함성이 아무리 뜨겁더라도
체제의 힘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냉철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체제수호자들이 손을 놓고 가만이 있었던 것은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다.
결코 힘이 없거나 구실이 없어서 강권을 발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군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자제하며 일망타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또한 폭력체제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무수한 선량한 생명들이 눈앞에서 또는 얼마 안있어 파멸에 직면할 현실 속에서
평화주의라는 원칙과 명분만 생각하여 뒤로 물러서서 예언대로 죽을 것만 기다리는 운명론자는 아닐 것이다.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은 폭력체제를 충분히 제압하고 다스릴만큼
그 힘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천군천사를 동원할 힘이 있다면 왜 그 힘을 동원하지 않겠는가.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 힘을 동원할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며
그의 등에 오로지 속죄양의 짐을 지게 하는 것은
자신의 우상에만 절할뿐 진정한 예수와 담을 쌓는 일이나 다름 없다.
예수는 평화를 상징하는 원리를 위해서
자신과 현실을 희생하는 이상주의자이기보다는
갈등과 고통속에서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싸우는
원리보다 현실을 택하고 중히 여기는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던 것은 비폭력인가 폭력인가?
왜 요더는 예수의 전적인 비폭력을 입증하려 노심초사하는가?
요더는 먼저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눅19:47)는 대목에 주목하여
이 사건은 예수가 성전관할권을 주장하는 자로서 '성전을 상징적으로 접수한 사건'이라 말한다.
이것은 영적인 가르침에만 익숙한 신자들에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놀라운 사회변혁운동자의 안목이다.
나아가, 요더는 '이 성전 청결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질서에 반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이었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예수를 체포하려는 음모에 대한 합법적 구실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나
예수의 대적자들은 그러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요더는 예수의 행동이 질서에 반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만일 그게 사실이었다면 얼마든지 체포하여 처형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체포하지 못한 것은 구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막11:18)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알지 못한 것은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눅19:47-48)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던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은
밤이 되면 물러났지만 군중이 사실상 성전을 계속 점령하고 있었다.
그 한 가운데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와 군중들의 힘은 막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속에서 평소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예루살렘 대성전 마당에서
예수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요2:15)
이같은 문제 앞에서, 요더를 비롯하여 평화주의자들은
예수는 성전 청결 사건에서 결코 어떤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예수의 비폭력을 강하게 옹호하며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요더의 말에 따르면 채찍을 휘두른 것은 양과 소 등 짐승들이며
사람을 겨눈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더라도, 짐승에 대한 것은 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어찌 그뿐인가.
예수는 복음서의 여러곳에서 언어폭력을 서슴치 않고 있음을 보게된다.마태복음 23장 거의 전면에 걸쳐
예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요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언어폭력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것이 원래 예수가 한 말 그대로의 것인지,
복음서기자들의 손끝에서 변질된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예수는 결백하다고, 예수에겐 아무 흠도 업다고 주장하는 일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당시의 성전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을 폭력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예수를 폭력과 비폭력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난폭한 사람으로 만들뿐이다.
차라리 정직하게 그 폭력성을 받아들이고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요더는 이때의 상황을 ‘한걸음만 더 나가면 상황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그래서 로마군 요새로 진격할 수 있는 쿠데타 직전의 ‘절호의 기회’임에도
뒤로 물러선 것은 ‘이제 그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라 한다.(87쪽)
그러나 이것은 쿠데타를 일으킬 ‘절호의 기회’가 아니다.
이때 모인 군중들의 열기와 함성이 아무리 뜨겁더라도
체제의 힘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냉철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체제수호자들이 손을 놓고 가만이 있었던 것은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다.
결코 힘이 없거나 구실이 없어서 강권을 발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군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자제하며 일망타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또한 폭력체제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무수한 선량한 생명들이 눈앞에서 또는 얼마 안있어 파멸에 직면할 현실 속에서
평화주의라는 원칙과 명분만 생각하여 뒤로 물러서서 예언대로 죽을 것만 기다리는 운명론자는 아닐 것이다.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은 폭력체제를 충분히 제압하고 다스릴만큼
그 힘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천군천사를 동원할 힘이 있다면 왜 그 힘을 동원하지 않겠는가.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 힘을 동원할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며
그의 등에 오로지 속죄양의 짐을 지게 하는 것은
자신의 우상에만 절할뿐 진정한 예수와 담을 쌓는 일이나 다름 없다.
예수는 평화를 상징하는 원리를 위해서
자신과 현실을 희생하는 이상주의자이기보다는
갈등과 고통속에서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싸우는
원리보다 현실을 택하고 중히 여기는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존 도미닉 크로산의 '비유의 위력'(The Power of Parable, 2012 김준우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에서
잘 다루고 있다.
<예수의 이야기>는 복음서기자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에 관한 이야기>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예수의 메시지가 현저하게 훼손되었으며
도전적이며 도발적인 언어로, 곧, 폭력으로 탈바꿈되어 있는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크로산에 의하면 인간의 폭력은 세 개의 연속적인 단계를 거치는데,
첫째가 이념적 폭력(생각하는 폭력)이며, 이는 다시 수사학적 폭력(언어적 폭력)을 거쳐
물리적인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수 자신이, 물리적인 간음, 언어적인 간음 이전에
마음으로 하는 이념적 간음이 있으며 그것이 문제임을 밝혔다.
비폭력이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