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2: 아나뱁티스트의 처음 하늘
...............................
'한국의 아나뱁티스트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것이 첫번째 나들이에서 생각해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점만 찍고 넘어간거죠.
이젠 두번째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것이 '아나뱁티스트의 처음 하늘'
곧, 아나뱁티스트가 어떻게 이땅에 둥지를 틀었는가를 살피는 일입니다.
...................................................................
이 땅에서 처음 아나뱁티스트들이 맞은 하늘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처럼 잘 정리되지도 않아 허물투성이의 연약했던 시절,
끊임없이 용솟음치며 꿈틀거리는 열정 속에 타오르던 아나뱁티스트가 본 하늘은...
아우성치는 함성속에 솟아오르는 개혁의 불길의 검은 연기속
참과 거짓 함께 어울려 한판 승부 겨루는 치열한 싸움의 한복판
빛과 어둠 사이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이 취한 선택은 무엇이었던가.
* * *
이렇게 써놓고 공부하기 시작하자마자 곧 두 손을 다 들었다.
자꾸만 눈덩이처럼 커가는 문제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가꿔놓은 연구들일랑은 그대로 덮어두자.
그대신,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넘어가는 대목들을 유념하자.
그래서 몇 가지 점이나 찍고 가자...
* * *
▨ 점 찍 기 (단 상) ▨
전남식목사님이 월요독서모임에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을 함께 읽는다는 말을 들었다.
책을 구하여, 대화를 위해
먼저 눈길을 끌었던 ‘2장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읽은 이야기를 적어보겠다.
1) 교회의 기원
요더는 교회의 기원을 종교적 기득권자들의 예수에 대한 분노에 찬 살해음모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향한 조직적 반대에 대해
새로운 사회적 실체(social reality)를 공식 출범시키는 것으로 대응한다’(72쪽).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혼자의 힘으로서는
기득권 체제에 맞설 수도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리를 지어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할 때
가르침은 단순한 가르침으로 머물지 않고 강력한 힘으로 기존 체제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란 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체이며,
하나님나라 운동이란 다름 아닌,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이요, 그 실체가 교회라 보고 있다.
이제까지 교회의 기원,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처럼 교회를 정치적 종교적 체제의 폭력지배에 대항하여
저항하는 거점이요 실체로 이해하는 표현은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같은 표현 속에는 교회란 ‘제도’가 아니라 ‘운동’체라는 기본이해가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고? 제도란 부패의 온상이며 모든 부패와 타락은 운동이 제도로 변할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운동으로부터 제도로의 변질, 그것이 곧 타락이요 부패다.
요더는 기성 기독교계가 주로 영성의 측면에서 논의하고 있는 교회나 예수에 대하여
‘영성’을 아우르면서 그 대극이라 할 수 있는 ‘혁명성’(또는 변혁성)의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크게 돋보인다.
교회란 내면적 변혁인 신앙뿐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동시에 일구어내는 실체이며,
그같은 교회의 뿌리가 다름 아닌 예수라 보고 있다.
2) (예고)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던 것은 비폭력인가 폭력인가?
왜 요더는 예수의 전적인 비폭력을 입증하려 노심초사하는가?
예수에게 허물이, 폭력이나 폭력의 그늘이 있다면 잘못된 것인가?
그거야말로 예수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참으로 귀중한 보배인가?
[문제제기] 하나님나라는 폭력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확실한가?
그러기 때문에 예수에게선 폭력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어야 하는가?
(요더의 책 83-87)
(.........후술. 오늘은 문제제기만.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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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나뱁티스트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것이 첫번째 나들이에서 생각해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점만 찍고 넘어간거죠.
이젠 두번째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것이 '아나뱁티스트의 처음 하늘'
곧, 아나뱁티스트가 어떻게 이땅에 둥지를 틀었는가를 살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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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처음 아나뱁티스트들이 맞은 하늘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처럼 잘 정리되지도 않아 허물투성이의 연약했던 시절,
끊임없이 용솟음치며 꿈틀거리는 열정 속에 타오르던 아나뱁티스트가 본 하늘은...
아우성치는 함성속에 솟아오르는 개혁의 불길의 검은 연기속
참과 거짓 함께 어울려 한판 승부 겨루는 치열한 싸움의 한복판
빛과 어둠 사이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이 취한 선택은 무엇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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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써놓고 공부하기 시작하자마자 곧 두 손을 다 들었다.
자꾸만 눈덩이처럼 커가는 문제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가꿔놓은 연구들일랑은 그대로 덮어두자.
그대신,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넘어가는 대목들을 유념하자.
그래서 몇 가지 점이나 찍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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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 찍 기 (단 상) ▨
전남식목사님이 월요독서모임에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을 함께 읽는다는 말을 들었다.
책을 구하여, 대화를 위해
먼저 눈길을 끌었던 ‘2장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읽은 이야기를 적어보겠다.
1) 교회의 기원
요더는 교회의 기원을 종교적 기득권자들의 예수에 대한 분노에 찬 살해음모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향한 조직적 반대에 대해
새로운 사회적 실체(social reality)를 공식 출범시키는 것으로 대응한다’(72쪽).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혼자의 힘으로서는
기득권 체제에 맞설 수도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리를 지어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할 때
가르침은 단순한 가르침으로 머물지 않고 강력한 힘으로 기존 체제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란 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체이며,
하나님나라 운동이란 다름 아닌,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이요, 그 실체가 교회라 보고 있다.
이제까지 교회의 기원,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처럼 교회를 정치적 종교적 체제의 폭력지배에 대항하여
저항하는 거점이요 실체로 이해하는 표현은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같은 표현 속에는 교회란 ‘제도’가 아니라 ‘운동’체라는 기본이해가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고? 제도란 부패의 온상이며 모든 부패와 타락은 운동이 제도로 변할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운동으로부터 제도로의 변질, 그것이 곧 타락이요 부패다.
요더는 기성 기독교계가 주로 영성의 측면에서 논의하고 있는 교회나 예수에 대하여
‘영성’을 아우르면서 그 대극이라 할 수 있는 ‘혁명성’(또는 변혁성)의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크게 돋보인다.
교회란 내면적 변혁인 신앙뿐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동시에 일구어내는 실체이며,
그같은 교회의 뿌리가 다름 아닌 예수라 보고 있다.
2) (예고)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던 것은 비폭력인가 폭력인가?
왜 요더는 예수의 전적인 비폭력을 입증하려 노심초사하는가?
예수에게 허물이, 폭력이나 폭력의 그늘이 있다면 잘못된 것인가?
그거야말로 예수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참으로 귀중한 보배인가?
[문제제기] 하나님나라는 폭력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확실한가?
그러기 때문에 예수에게선 폭력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어야 하는가?
(요더의 책 83-87)
(.........후술. 오늘은 문제제기만. 여기까지^^..........)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설익은대로 글을 올립니다.
오히려 체계적인 글보다
설익은 단편적인 글이
대화를 위해서는 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대화란 결코 편안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
때로는 여간한 정성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