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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평화  Missional Peace



* 우리는 제자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선교와 평화를 추구하고,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며, 개인, 가정, 교회를 넘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한다.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회복임을 믿는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적으로 우리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모든 분리와 소외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곧 우리 내면과, 서로 다른 사람과,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의 깨어짐과 분리, 소외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능력임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당신의 화해의 왕국으로 초대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 나라는 야훼의 샬롬의 왕국 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나라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완성하실 테지만, 그 나라의 확장을 우리에게 맡기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화해의 왕국의 전사들로서 화해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싸운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의 무기는 혈과 육이 아니라 믿음과 성령과 순종과 사랑임을 믿는다.
우리는 산상설교가 화해의 왕국 백성의 삶의 길을 보여준다고 믿으며, 산상설교를 준수하는 것이 화해의 왕국을 확장하는 최우선의 길임을 믿는다. 산상설교의 준수로 세상과 대조되는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보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한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돕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고, 병든 자를 치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좋은 소식임을 알린다.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서 화해를 선포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 역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요, 선교다.  말로써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설득하고 변증한다. 이러한 전도와 선교는 궁극적으로 평화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참됨을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 가정, 직장, 교회, 그리고 국가에서 평화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쓴다. 


공동 헌신 Shared Commitment IV



우리는 제자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선교와 평화를 추구한다. 또한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며, 개인, 가정, 교회를 넘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헌신한다.
1) 자신과 공동체의 삶에서 우상이 무엇인지를 늘 깨어 분별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회개한다. 우리는 국가나 가족이나 보험이나 모아 놓은 돈과 같이 하나님 이외에 안전하다고 의지하는 것을 떠나는 실제적인 연습을 한다.
2) 될 수 있는 대로 분노를 삼가되 분노하더라도 죄를 짓지 않으며, 시간이 가기 전에 분노를 해결한다.
3) 우리에게 악을 행한 이웃을 용서한다.
4)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힘쓴다.
5) 예배 때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선포하고, 기뻐하고, 즐긴다.
6) 하나님의 샬롬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경주한다.
7) 자신과 공동체 안에서 나눔과 분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분리의 영을 제거하고,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며 열린 마음으로 환대를 실천한다.
8) 화해에 대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단계, 특히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따른다.
9)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고, 시간의 청지기가 된다.
10) 늘 복음을 전하되, 필요한 경우 말로써 명료하게 복음을 전한다. 강요하지 않되, 진실한 말과 설득과 인내로써 복음을 전한다.
11) 특별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를 세우기를 힘쓴다.
12) 역사 속에서나 현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분리와 다툼, 경쟁을 회개한다.
13)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크고 Anabaptist보다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다른 교회 및 교회들과 연합을 도모한다.
14) 자기 안의 폭력의 성향을 분별하고, 말과 행동 속에 들어 있는 폭력의 영성을 평화의 영성으로 바꾼다.
15) 선교의 출발지인 가정에서 평화 이루기를 힘쓰며, 가정예배의 성공을 돕는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
16) 지역사회의 필요를 파악하고, 책임을 공유하는 사회적 기능을 감당한다.
17) 국가나 지역사회의 평화와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  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웠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도 죄 없이 선하고 아름다웠다. 죄를 짓기 전까지 인간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다른 인간과, 그리고 피조물과 완전한 조화와 평화, 사랑의 연합을 이루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서로를 기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온전한 관계였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아내 이브와 동물들을 이끌고 자신에게 나오실 때, 하나님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기쁨으로 하나님과 아내와 동물들을 맞이하였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언약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이 언약관계는 한편으로는 남편과 아내 간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의 관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군과 신하 간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충성의 관계였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었던 인간은 숨김없이 자신의 내면과 대면할 수 있었다. 부릅뜬 양심은 인간을 고발하지 않았으며, 위선과 거짓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직한 영으로 충만하여 자유 함을 누렸다. 인간은 또한 서로를 온전히 사랑했다. 아담은 아내를 “내 살이요 내 뼈”라고 고백하였다. 남자와 여자는 온전히 동등했으며 지배와 억압은 존재하지 않았고, 사랑과 섬김만 존재했다. 인간의 책무는 왕으로서 피조물을 통치하는 것이었는데, 이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것이라야 했다. 하나님의 통치는 공중의 새와 들풀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섬김과 돌봄의 통치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섬김과 돌봄으로 피조물을 다스렸다. 이처럼 에덴에서는 어떠한 분리와 나눔, 지배와 억압, 폭력과 다툼은 존재하지 않았다. 야훼의 샬롬이 왕노릇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복락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했다. 인간은 에덴에서 하나님을 추방하기 원했으며 하나님의 왕좌에 앉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뱀-여자-남자가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인간은 하나님의 등에 배신의 칼을 꽂았다.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죄는 본성상 법적이거나 윤리적이기 앞서 신학적이고, 동시에 정치적이다. 메노나이트 신앙고백이 잘 말해주듯이 “죄란 우리 자신을 위해 다른 신을 만드는 것” 곧 우상숭배가 죄이다. 아담 이후로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의 자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뭔가를 올려놓았다. 자기 자신을 올리기도 하고, 가족을 올리기도 한다. 고대인들은 태양과 하늘, 나무와 짐승들, 왕이나 황제 등을 높이 추켜세웠다. 현대인들은 돈, 권력, 쾌락, 테크놀로지, 국가, 민족, 인종, 과학 등을 올려놓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우상은 세상을 파괴하고, 인간을 노예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상숭배로부터 세상과 인류의 불행이 시작된다.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 인간과 하나님 간의 언약 관계는 깨어졌다. 한편으로는 남편과 아내 간의 사랑의 언약관계가 깨어졌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군신간의 충성의 언약관계가 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죄는 한편으로는 불륜과 외도의 성격을 지니며, 다른 한 편으로는 주군을 배신한 역모의 성격을 지닌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원수관계가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버린 남편이자, 주군이신 하나님의 낯을 더 이상 뵐 면목이 없게 되었다. 한 때 하나님께서 에덴을 거니실 때, 인간은 기쁨으로 나와 하나님을 맞이했으나, 이제는 “아담아 아담아”를 외치며 자신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피해 바위 뒤로 숨는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소외되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몸을 숨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선포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에서 나타났으며[출20:19]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광채를 피해 바위틈 사이로 숨어드는 죄인들의 반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계6:15-16]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파괴는 연쇄반응을 불러왔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내면과 평화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부릅뜬 양심의 눈은 끊임없이 인간을 정죄하기에 바쁘게 되었으며 인간은 그러한 자신의 양심을 무마하고 속일 다양한 꾀를 지어냈다.[전7:29] 마음은 분열되었고, 인간은 늘 변명과 책임전가로 양심의 심판으로부터 도망치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한때 “내 살이요 내 뼈”라고 했던 아담은 이제 하와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창3:12] 그날 이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지배와 착취, 억압, 살인이 들어왔다. 특히 폭력적 지배는 인간  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서로를 소외시키며, 사랑의 관계를 깨뜨려 폭력과 지배의 관계로 바꾸어 버렸다.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도 깨어졌다. 본디 인간은 피조물을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따라 섬김과 돌봄으로 통치하는 왕이었다. 하지만 피조물 중 하나인 뱀의 꾐으로 아담은 하나님을 거스르게 되었다. 그날 이후 피조물인 뱀과 그의 후손은 인간과 원수가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는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인간은 피조물을 숭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착취하는 양극단의 모순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고래로 인간은 해, 달, 별, 산, 바위, 바다, 맹수, 부적 등을 섬겨왔다. 현대인들은 돈, 국가, 민족, 인종, 권력, 지위, 명예, 상징 등을 섬긴다. 이러한 우상숭배로 인해 인간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구와 조직은 쉽사리 악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세상의 제도와 기구는 중립적이지 않으며 악한 정신(spirit)을 내포함으로써 정사와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활동하는 도구가 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피조물을 제멋대로 착취한다. 재미삼아 동물을 사냥하여 죽이고,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더럽히고, 창조세계를 변형시킨다. 인간복제와 같은 다양한 첨단 테크놀로지는 창조세계의 근본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극단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인간과 피조물 간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비롯된 결과이다.
인간의 반역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세상과 인간 세계는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온갖 재앙과 질병으로 신음하며 고통하게 된다. 수많은 구원의 길을 모색해 보지만 그 어느 것도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애굽의 노예 히브리 민족은 소망 없는 인간과 세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바로와 애굽의 지배 아래에서 극한의 비인간적 조건 하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히브리 민족은 정확히 아담의 반역 이후 인간이 겪어왔던 저주와 불행의 압축판이다. 더욱 슬픈 것은 히브리민족이 자신들의 힘으로 그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다만 절망과 한숨, 신음 뿐이었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의 구원이 찾아왔다. 자신을 배신한 인간과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시어 그들을 건져주시기로 결심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결심은 아담과 온 피조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창조세계를 멸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보전하시기로 하신 것과 또한 짐승을 죽여 인간에게 옷을 해입혀 주신 사건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심으로 당신의 구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으며,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심으로써 그 요체를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들을 해방하셨으며, 홍해를 건너가게 하셨다. 이것이 구원, 곧 엑소도스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보다 온전한 모습은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통해 나타난다. 이 언약은 에덴에서의 그 최초의 언약의 회복을 나타낸다. 인간의 반역 이후 최초로 하나님과 인간은 화해하게 되었다. 인간과 하나님의 멀어진 관계는 극적으로 가까워졌으며, 이스라엘 진 한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집,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표징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온전한 사람으로 사셨다. 그의 실존은 아담의 회복을 의미한다. 죄없으신 예수께서는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반역자들을 용서하실 근거를 마련하신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는 심각하게 다루되, 죄인은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원수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셨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용서의 광채는 비교할 바 없이 탁월하지만, 이러한 용서의 빛은 인간의 역사 속에도 종종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다. 예컨대, 지난 2006년 10월에 있었던 아미쉬의 용서가 그 한 계이다. 찰스 로버트가 아미쉬 마을에 난입하여 어린 여학생 5명을 죽이고, 5명에게 총상을 입힌 후, 결국 자신도 자살하였던 사건이 일어났다. 펜실베이니아, 니켈 마인즈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무런 원한의 관계없는 사람이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진 아미쉬 마을 한 복판에서 어린 여학생들에게 행한 폭력, 그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에 안전지대가 없다는 사실에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세계인은 또 한 번 충격을 받게 된다. 이른 아침 발생한 이 사건으로 인해, 찰스 로버트의 유가족과 희생자 유가족은 원수 지간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는 말씀을 따라 아미쉬 희생자 유가족은 원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난 당일, 희생자 가족과 그 마을의 아미쉬들은 로버트의 가족을 찾아가 용서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아미쉬의 용서는 당시 취재차 그 지역을 방문하고 있던 기자들에 의해서 생생히 보도되었다. 폭력의 사건에 잇따라 일어난 이 용서의 사건은 또 다른 충격의 파장을 몰고 미국과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용서의 은총을 “아미쉬 은총(Amish Grace)”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은총은 놀랍고도, 비범하며, 상식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수치와 분노, 죄책감, 슬픔에 빠져 있던 로버트의 가족을 당황시키고, 그 놀라운 은총에 굴복하게 하고 만다. 그리고는 끝내 먼저 내민 화해의 손을 맞잡게 하고 말았다.
이것은 여러모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미신 화해의 손길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바람난 아내를 용서하듯, 또한 군주가 역모를 꾀한 역도를 사면하듯 그렇게 엄청난 용서와 대사면을 단행하셨다. 그리고 다시금 사랑과 충성의 관계를 맺자고 초청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께서 내미신 화해의 손길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다시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 새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재침례교 신학자 후브마이어가 잘 설명했듯이 구원이란 관계의 회복이다. 일부 통속적인 구원관은 구원을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하나의 유비일지언정 실재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원수 되어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 곧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천국을 얻거나, 이 땅에서의 복을 받거나, 영생을 얻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란 에덴에서의 관계, 곧 사랑과 충성의 언약관계로 다시 들어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구원은 관계적이다. 때문에 구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이고 관계적 상호작용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화해는 죄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원수관계는 청산되고 죄인은 하나님을 예전의 관계로 다시 만날 수가 있다. 시내산 언약의 결과로 이스라엘 진 안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졌으며, 이스라엘과 동행하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 세상 속에 들어오셨으며 시내산 언약을 능가하는 새 언약을 자신의 제자들과 세우셨다. 제자들과 맺으신 새 언약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시고,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상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다. 기독교인은 예배 때마다 예배의 자리에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환영하며, 경축하고, 기뻐하고, 즐긴다.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은 자신의 양심과도 화해하게 된다. 하나님, 당사자로부터 용서받았기에 인간은 더 이상 양심의 기소를 받을 필요가 없다. 바울이 선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니 나도 나를 정죄할 수 없다.[고전4:3]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수치를 가리거나, 죄를 은폐할 필요가 없다. 용서가 왕노릇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이웃과의 화해를 창조해 낸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는 모든 용서의 기초가 되어,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원수를 용서할 의무를 지게 된다. 하나님과 화해한 인간은 다른 사람과 화해하며, 또한 화해를 이루게 하는 자가 된다. 이것이 주기도의 중요한 강조며,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의 주제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가져다주신 화해는 피조물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되돌려 놓는다. 인간은 더 이상 사물과 물질, 피조물에게 숭배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신이며, 또한 주, 곧 왕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참된 신앙은 돈과 권력, 국가, 테크놀로지, 인종, 성별, 민족을 제 위치로 돌아가게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 신으로 예배하고, 자신의 주군으로 충성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들은 창조세계를 숭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착취와 지배도
하지 않는다. 돌봄으로 창조세계를 대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지금도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돌보시듯이...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화해는 거대한 세계 변혁을 초래한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기 자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창조 세계 전체에 걸친 대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웅장한 구원 계획을 구약성서는 “야훼의 샬롬”이라고 표현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셨다. 이사야서와 미가서에서 밝히 보여주듯 구약의 야훼의 샬롬은 전쟁 종식과 무기 제거로 나타난다. 또한 이사야서 11장에서 볼 수 있듯이 먹이사슬의 지배하에 있는 생태계가 평화의 질서의 지배를 받는 생태계로 광범위한 변화를 겪는다. 또 야훼의 샬롬은 창조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셨으며,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신 안식의 질서를 정착케 한다. 때문에 야훼의 샬롬은 모든 빚이 청산되고, 토지를 돌려받고, 노예는 해방되고, 죄는 용서를 받으며, 생계형 노동은 종말을 이루는 안식이다. 또한 샬롬은 정의를 하수처럼 흐르게 하고, 공법을 물처럼 흐르게 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야훼의 샬롬의 질서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야훼의 샬롬을 온전히 이루시고, 그 나라를 개시하셨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탁월한 그리스도의 성취는 바로 사망을 죽이시고, 부활의 세계를 열어젖히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부활과 함께 부활의 세계가 열렸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죽고, 인간에게는 죽지 않는  부활이 약속된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던 모든 저주와 악, 부조리, 전도서 기자가 탄식 했던 헤벨, 곧 허무가 극복된다. 이러한 야훼의 샬롬은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완성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시작된 샬롬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자들이다. 이는 마치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으나, 이스라엘이 직접 싸워 자신의 발로 밟아 점령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야훼의 샬롬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그 샬롬을 확대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물론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혈과 육의 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과 성령과 기도와 순종과 자비와 사랑이다.
야훼의 샬롬의 왕국을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선교다. 교회는 선교로 부름 받았다.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 원리가 잘 말해주듯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 가운데 보내셨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이미 실현된 샬롬의 왕국을 담지한 자다. 교회가 이미 실현된 샬롬의 왕국을 현시하는 것에서 선교는 시작된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 샬롬의 왕국을 실현하고, 그 형태를 드러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샬롬의 왕국으로서 교회는 모든 분리와 나눔, 구분과 구별을 철폐하고 화해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생물학적 차이(남 vs 여)로 인한 분리, 사회적 계층의 차이(종 vs. 주인)로 인한 분리, 종교-문화적 차이(유대인 vs. 이방인)로 인한 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러한 복음의 급진적 화해 조정은 에베소서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은 그리스도께서 허무셨다. 모든 막힌 담이 사라지고, 구별과 구분이 철폐된다. 이 새로운 질서가 바로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는 가족, 국경, 분단, 인종, 민족, 문화, 위계, 계층, 차별, 멸시를 종결시킴으로써 스스로 샬롬의 왕국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하한 종류의 “주의(-ism),” 예컨대, 부르주아적 가족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 문화우월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거부한다. 이들 “~주의”는 우상이며, 야훼의 샬롬을 파괴하는 분리의 영들이다. 교회는 인간의 양심과 이성으로 만들어 낸 ‘~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특히 산상설교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늘 묵상하고 실천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또한 교회는 배고픈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 깨끗케 함으로써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사랑, 그리고 화해의 손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모든 섬김은 개종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야훼의 샬롬을 드러내는 선교요, 사랑의 이중계명에 복종하는 신자의 삶의 양식이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담지자로서의 자신의 존재됨으로 선교를 시작한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 만으로가 아니라 말로써도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 삼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는 회개의 길과,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알려주어야 한다. 돌이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도록 초대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제자 삼기를 힘써야 한다. 참된 신앙인은 제자라야 하며, 제자에게 침례/세례를 주어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개종자를 끌어 모으는 것이나, 교회를 무한정 성장시키는 행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할 수만 있으면 교회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꿈꾸며,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게 맡겨진 선교의 사명이자 교회에 주어진 신실함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복음의 전파가 평화의 열매를 일구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는 교회가 증거하는 복음이 참된지를 검증하는 리트머스이다. 동시에 평화는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노라 하면서 평화하지 못한다면 그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위선자다. 평화가 없다면 그 복음은 가짜다. 복음은 본성상 화해의 복음으로서, 평화를 일구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공교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려고 했던 분파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독교회는 복음을 전함으로 평화를 이루기보다는 다툼과 분리, 전쟁을 초래했다.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부끄러운 죄악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유를 불문하고 교회가 분리하고 다투고 분리함으로써 평화의 복음을 위태롭게 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스스로 평화를 만드는 자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며, 내면의 폭력적 성향과 맞서며, 평화 만들기를 훈련함으로써 화목동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근원적 관계를 맺는 가정에서 평화를 이루기를 힘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평화를 일구는 훈련을 지속해야 한다.
나아가 직장과 사회, 국가에서 평화를 이루는 일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 평화의 열매를 일구는 노력은 사회 정의 및 경제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땅에 평화가 왕노릇하도록 힘쓰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책무와 분리될 수 없다. 선교와 평화 만들기는 그리스도인의 피할 수 없는 사역의 두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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