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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Church Community



*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세우며, 모든 민족과 열방을 향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우리는 참 신앙을 가진 자에게 참 침례를 주어 참 교회를 이루는 일에 헌신한다.1)  우리는 참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의 악수를 받아들이며,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 관계 속에 들어가기를 자발적으로 결단해야 한다고 믿는다. 2) 참 교회란 신자들의 교회요, 제자들의 공동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모인 국가며,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가족관계로 묶인 하나님의 새 가족임을 믿는다.3)  우리는 참 교회란 불가피하게 세상과 구별되고 차별되며, 그 차별성이 부각되고,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보이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음을 믿는다.4)  우리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 순종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 사랑 안에 거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주님의 최고 명령으로 여기고 이를 준수하고자 헌신한다5).  우리는 교회가 차별 없이 모여든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가족임을 믿는 고로 교회는 불가피하게 다민족, 다인종 공동체가 됨을 기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며, 우리 모두는 존중받고 사랑받는 형제요 자매로 동등함을 믿는다. 우리는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며, 공동체 내에서는 전체와 개인이 분리되지 않으며, 차별이 없음을 믿는다. 공동체에서 모든 개인은 전체만큼 존중받고 사랑 받는다.


 
공동 헌신 Shared Commitment III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세우며, 모든 민족과 열방 가운데 존재하는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헌신한다.



1) 올바른 침례/세례를 시행하기 위해서 힘쓴다. 이를 위해서 복음을 올바르게 믿는 참 신앙을 가진 자에게 침례를 베푼다.

2) 교회의 모든 형제자매는 모두 성직자요, 사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교회의 의식은 공동체가 베풀며, 공동체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닌 말씀을 함께 읽고, 함께 해석하고, 함께 실천하는 과정을 만든다.

3) 관계의 회복은 구원의 핵심이며, 가장 힘써야 할 교회의 실천이다. 따라서 갈등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마태 18:15-17 절을 적용한다. 

4) 그리스도 이외의 것으로 인한 교회 안의 갈등을 해결함에 있어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며, 모든 갈등을 하나님의 샬롬 아래로 가져간다.

5) 교회는 규칙적인 모임을 갖는 공동체로서 주 1회 이상 가정이나 교회에서 모여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식탁의 교제를 나누기를 힘쓴다.

6) 교회는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스스로를 점검하며, 언약을 갱신하고, 헌신를 새롭게 하며, 서로 권면하여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기 위해서 노력한다.

7) 공동체의 경험을 중시하며, 주어진 과제는 실험을 통해 정리해 나간다.

8)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믿고,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와 대화하며, 협력하며,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다.

9) 우리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인정할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다른 인종, 민족을 형제•재매로 받아들인다.

10) 나그네 된 자를 환대하고, 외국인 이주민이나 노동자과 같은 이방인을 초대하고, 그들의 벗이 되기 위해서 준비하며 실행한다.

11)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결되도록 격려한다.

12) 교회 공동체는 서로의 필요에 열려있으며, 사랑의 고백이 위선이 되지 않도록 실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  주 1) 16세기 아나뱁티스트는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모두의 배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속정부로부터도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이 받은 박해의 많은 부분은 바로 이 유아세례 거부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나뱁티스트들은 유아세례를 거부했을까?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 침례/세례를 시행했으나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의식 자체를 중요하게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침례는 단순히 의식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침례수는 그냥 맹물이요, 집례자는 그냥 사람에 불과하다. 가톨릭교회가 말하듯 거기에 무슨 마법적이고 사효적인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듯 침례/세례와 연관된 질료들이 언약이 덧붙여 성례적인 재료들로 변하지도 않는다. 아나뱁티스트들 대부분은 소위 말하는 보이는 은총, 곧 성례전 Sacrament 를 인정하지 않는다. 통상 가톨릭교회는 7가지를, 개신교회는 2가지를 성례전으로 인정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세례/침례와 성찬은 성례전이 아니다.
하지만 침례나 성찬을 성례전으로 존중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그 어느 교회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 중에서도 재침례교회를 기존의 다른 여타의 교회와 날카롭게 구분한 것이 바로 재침례의식, 곧 아나뱁티즘(Anabaptism)이었다. 사실 아나뱁티즘은 두 번 침례를 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재침례교도가 좋아하는 이름이 아니다. 후브마이어가 여러번 언급했듯이 아나뱁티스트는 두 번 세례/침례를 주는 자들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침례를 주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세례/침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참 신앙을 갖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식인데, 이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는 참 신앙을 가진 참 신자로 공적 인정을 받게 된다. 이때 이 인정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신비적인 마법이 덧씌워진다거나, 신성한 낙인이 찍히는 보증수표를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령께서 인정해 주시리라는 믿음의 표현이면서, 아울러 수침자 자신과 공동체 전체가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침례라는 의식은 철저하게 교회 공동체와 관계하는 것이다. 침례/세례를 베푸는 주체는 성직자나 사제가 아니라 교회공동체다. 교회의 모든 멤버는 다 성직자요, 사제다. 교회공동체가 참 신앙을 가진 자에게 침례를 주어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이것이 재침례교도가 의도했던 침례의 의미였다.
 2) 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톨릭교회가 말하듯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고, 성례전의 객관적 효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 아니요, 또한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듯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값없이 거저 전가 받는 것도 아니다. 참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믿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주(savior)와 주님(Lord)으로 인정하고, 그 분을 따르며,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곧 그리스도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이시며(Godship), 또한 세상의 실제적인 참된 통치자, 곧 왕이시라는 고백(kingship)을 포함한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필연적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자신의 주군을 향한 충성(loyalty)과 정절(fidelity)을 요구한다. 아울러 그의 백성들의 종 됨(servantship)과 제자됨(discipleship), 그의 나라 백성으로서의 시민됨(citizenship)을 요구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첫째 명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과 법을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상이 신앙의 참된 의미이다.
따라서 침례는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의 나라의 신민들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다. 침례는 무슨 권능이 있는 성례전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시행하라는 명령으로서, 참된 신앙, 그리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베푸는, 그들의 신앙에 대한 외적이고 공적인 표식이다. 때문에 침례보다 신앙이 더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신앙이 없는 침례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신앙을 가졌노라 하는 이가 침례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는 뜻이요, 교회 공동체의 인정을 거부한다는 뜻이므로 그의 신앙은 필경 병들었거나 왜곡되었음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참 신앙과 교회 공동체를 연결하는 가교이다.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침례는 교회의 문이다. 다른 문은 없다. 참된 신자는 반드시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교회는 참 신앙을 가져서 참 침례를 받은 참 신자들의 모임이라야 한다.
 
3) 참된 신앙을 이루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자발적 결단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복음을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어야 하며, 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옳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겠다고 스스로 결단하는 과정이 모두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savior)와 주군(Lord)으로 모셔 들이겠다는 인격적 결단을 포함한다. 따라서 믿음이란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자발적 결단과 참여 없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 속에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다. 참 믿음은 불가피하게 인간의 참여와 응답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이나 복음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이방인들은 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또한 복음을 듣고 이해했으나 결단하고 관계 속에 참여하지 않는 자 역시 참 믿음을 가진 자가 될 수 없으며, 침례/세례도 주어질 수 없다.
재침례교회가 강조하는 결단과 참여에 관해서 많은 오해와 악의적 비평이 존재한다. 이것은 상당부분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두 사람이 벌인 논쟁이 만들어 낸 인식의 틀 때문에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아나뱁티즘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아나뱁티즘이 펠라기우스주의, 내지는 세미 펠라기우스주의가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아나뱁티스트는 두 사람의 논쟁에 끼어들기를 거부한다. 아나뱁티스트는 옛 교부들의 논쟁 보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구원을 이해하고 해석하기를 더 좋아한다.
성서의 언어를 통해 바라보는 구원이란 관계 맺음이다. 하나님과 내가, 그리고 세상이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관계가 틀어져 있다가, 그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은 관계의 회복이고, 화해다. 따라서 후브마이어가 잘 말해주었듯이, 구원이란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나는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기로 결단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미신 화해의 악수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가 구원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다. 단순히 말해서 이것은 관계의 본질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때 상식적으로 반복하는 관계 행위이다. 내가 누군가와 가까이 지낼 것인가, 말 것인가? 또 가까이 지내는 사람과 계속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이러한 선택과 결단을 내리며 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란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고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꾸준한 결단에 응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속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하고도 엄숙한 결단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마치 결혼하기 원하는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청혼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남성처럼, 그리고 이 청혼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여성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오신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결단해야 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관계를 맺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치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사귀자고 프로포즈를 했을 때 여성이 일단 이를 받아들이면, 두 사람은 연애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단 연애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두 사람은 규칙적으로 전화해야 하고, 만나야 하고, 편지도 쓰고, 사랑의 감정을 고백해야 하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일들을 해내야 하는 의무
가 생기게 된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기독교 신앙과 구원 안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진다.
태초에 범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복음과 신앙으로 다시 회복된다. 에베소서의 바울 식으로 표현하면 막힌 담을 허물고, 원수 관계를 청산하고, 사랑의 관계로 연합하는 것이다. 바르트 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화해(reconciliation)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화해가 일어난 뒤 우리는 그리스도는 점점 더 친밀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들을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기독교 구원은 서로 간의 화해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한다. 친밀함과 사랑, 화해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수평적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의 모임은 그리스도를 예배할 뿐만 아니라 친밀감을 누리고, 서로를 사랑하며,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필요하다. 기독교 예배를 태동시킨 성찬의 자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공동체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의 이중적 사랑, 이중적 화해, 이중의 코이노니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의식이다.
 
4) 그러면 지상의 교회가 과연 순도 100%의 순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프로테스탄트들은 참 신앙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완벽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지상에는 온전한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지상의 교회는 불가피하게 위선자와 참 신자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온전한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상이 아니라 천상의 보이지 않는 교회일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을 살펴보면 천상의 보이지 않는 교회와 지상의 보이는 교회가 있는데, 천상의 보이지 않는 교회는 참 신자들로만, 혹은 택자들로만 모인 총회이며, 지상의 보이는 교회는 신자와 위선자가 섞여 공존하는 밀밭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상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교회를 굳이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 안에 복음에 대한 선포가 있고, 그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이러한 교회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특히 청교도의 역사를 보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많은 성화의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에 따르면 교회는 복음 전파 이외의 요소로 세상과 구별되었던 적은 많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이는 교회를 처음부터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밭으로 여겨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참 신자들의 모임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그렇다기 보다는 규범적이고 당위적으로 그러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원칙적으로 교회는 참 신자들의 모임이라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쳐나가고 정화해 가야 할 부분일 뿐이다. 즉 순수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과제이지, 원래부터 교회는 밀과 가라지가 뒤섞인 곳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일 교회가 참 신자들의 모임이 된다면 그 교회는 불가피하게 세상과 분리될 수밖에 없다. 참 신자들로 이루어진 온전한 교회가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 세상과 구별된 형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점에서 재침례교회는 신자의 교회이면서, 제자의 교회고, 나아가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이다.
이런 이유로, 재침례교회는 종종 분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는 종파를 지향하지 않는다. 후브마이어를 비롯한 여러 아나뱁티스트 사상가들은 교회로부터 분리된 또 다른 교회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교회의 갱신을 원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회 있는 대로 종교개혁자들과 자신들이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급진적이고, 성서적인 갱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스스로를 종교개혁의 연장선상에 위치시킨 것이며, 아울러 기존 교회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스스로를 단절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도리어 기존교회가 재침례교회를 분리해 냈으며, 악의적으로 비난하며, 부당하게 핍박하였다. 재침례교회는 오직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우심을 받은 그 교회를 알 뿐, 다른 교회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나뱁티스트는 타교단과의 에큐메니컬한 대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나뱁티즘을 어떤 종파나 분파가 아님을 밝힌다. 따라서 ‘~파’라는 용어는 아나뱁티스트를 올바르게 표현한 것이 아니다.
 
5) 만일 교회가 참 신앙을 고백한 참 신자들의 무리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신(God)이자, 주(Lord)로 고백하는 이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분명 세상과는 현저한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차별성은 세상의 지배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별성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차별성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빛, 소금, 산 위의 동네라는 유비를 통해 표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를 문자적으로 준수하는 이 공동체는 마지막 날 우리가 유업으로 받게 될 그 하나님 나라와 닮게 된다. 교회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이 현존하시며, 그 영이 개인과 공동체를 치유하고, 회복하여, 온전케 하신다. 그리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이며, 미리 맛보는 예표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사랑의 나라라는 것이다. 모든 관계의 소외가 극복되고 원수맺음이 풀려나는 화해의 나라이다. 모든 구별과 차별이 철폐되는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나라요, 또한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나라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따르고 충성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모임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교회는 사랑의 DNA를 가진 시민들로 세우진 새로운 국가다.
교회는 국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새 가족이 된다. 이 가족은 혈육으로 말미암는 가족이 아니라, 믿음과 신앙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인종, 성별, 나이, 민족, 나라를 막론하고 한 가족이 된다. 신분, 계층,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 가족으로 모인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성적으로 다민족, 다인종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동체는 이 가족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이 가족은 지상에서 전혀 새롭고 이질적인 질서를 창조해 낸다.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가장이 되신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하나님 외에 아버지 되는 사람은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외에 머리가 되는 자도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스승이 되신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스승으로 자처할 사람은 없어야 한다. 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가 된다.
교회는 제도가 아니며, 가르침을 받는 학교가 아니다. 제도로서, 혹은 강당으로서의 교회는 교회의 온전한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교회는 새 나라며, 동시에 새 가족이라야 한다. 또 다른 말로 교회는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가 공동체라는 말의 의미는, 교회가 개인과 전체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개인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교회를 한 몸이라고 비유한 말의 참된 뜻이 여기에 있다. 교회 안에서 한 개인의 존재는 전체의 존재
와 맞먹는다. 한 지체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고, 한 몸을 이루는 지체가 존중을 받으면 온 몸이 사랑받고 존중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과 존중은 실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도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말과 혀로만 사랑해서는 참사랑이 아니며, 야고보가 소리높여 질타했던 것처럼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의 사랑은 실제적인 형태를 띠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모두의 실제적 필요에 개방되어야 한다. 물질적 필요, 정서적 필요, 관계의 필요 등을 채워주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6)  존 하워드 요더의 몸의 정치학(Body Politics) 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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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하다용해 2011.02.01 13:47
    이성하목사님의 글

    공동체 가치 III


    우리는 참 신앙을 가진 자에게 참 침례를 주어 참 교회를 이루는 일에 헌신한다
    진짜 순 참기름이 떠오르네요.
    참참참 피흘리신…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복음성가도 떠오르고요.
    우리가 참이면 남들은 어떻게 되나요? 참스러운, 참다운, 거~참.


    교회란 불가피하게 세상과 구별되고 차별되며


    구별과 차별은 어떻게 구별되고 어떤 차별점이 있나요?

    구별이라 함은 서로 다름을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 것 같아서,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차별이라 함은 당장에 뇌리를 때리는 생각이 아파르트헤이트의 그것이라서 순간 호흡이 가빠지는 생리학적 현상을 불러오는데, 이를 어찌 순화시킬지, 혹은 소화시킬지 초강력 울트라 슈퍼파워 캡숑 소화제가 필요한듯.



    우리는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며, 공동체 내에서는 전체와 개인이 분리되지 않으며, 차별이 없음을 믿는다.


    난 국기에대한맹세를 날마다 외우며 자란 세대라서 국가, 조국, 공동체 등의 가치에 개인의 가치가 마구 함몰되는 그런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전체와 개인이 좀 떨어져 살면서 손 잡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마구마구 하게 되는 그런 입장이라서…

    꼭 샴쌍둥이처럼 살아야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겨드랑이에 땀도 나고…아~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라는 책에서 함께 숲을 이루지만, 나무는 서로 적당히 떨어져야 더 좋다고 말했는데, 아~…


    1) 올바른 침례/세례를 시행하기 위해서 힘쓴다.


    이런 무자비한 통일, 혹은 조합을 반기지만, 반기문처럼 기름장어같다는 말을 듣지는 않을까…


    6) 교회는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스스로를 점검하며, 언약을 갱신하고, 헌신를 새롭게 하며,


    드디어 오타 발견 “헌신를”…”헌신을”…ㅋㅋㅋ

    그런데 언약갱신은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몇 번 이상해야 하는 건지…그냥 회개하면 안 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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