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가치 Shared Value I.
예수 그리스도 중심Jesus Christ Centered
*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로서 개인과 교회, 역사와 세상의 중심이시며, 우리의 궁극적 충성의 대상이자 유일한 주이시다.
우리는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체험을 따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神이자 主라고 고백 했던1 초대교회의 신앙을 따라2 ,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신실하게 반응하고자 했던 16세기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을 따라3 , 그 외 신실하게 주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 백성이라고 믿고 실천했던 모든 신앙 선배들의 모범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시요, 우주의 근원이시요, 세상의 중심이시요, 역사의 기초라고 믿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유일하게 배타적으로 충성을 다 바쳐야 할 주님(Lord)이시다.
이 첫 번째 원리는 나머지 세 가지 원리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은 아나뱁티즘의 기초이며, 성경해석의 열쇠이자, 모든 그리스도 교회의 핵심가치이다.4
공동의 헌신 Shared Commitment I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서 개인과 교회, 역사와 세상의 중심이 되심과, 우리의 궁극적 충성의 대상이자 유일한 주이심을 고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헌신한다.
1. 그리스도의 사건과 사도적 신앙의 계승을 위해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가르침, 죽으심, 부활이 성서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다.
2. 그리스도인이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그를 예배했던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온 세계의 유일한 주로 믿고, 인정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침례/세례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선언하고, 성찬의 자리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세계의 주군이신 그리스도와 사귄다.
3. 기독교 예배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 예배드리는 자는 다른 것을 예배하지 않는다.
4.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자는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리스도 이외에 섬기고 있는 우상이 있는지를 분별하고, 우상을 섬기기를 그만두는 실제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5. 교회는 그리스도만을 예배하는 신실한 언약백성들인고로, 자신 안에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국가주의, 기술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영역 속에 자리잡고 있는 충성의 대상이 있는지 살펴보고, 이를 분별하여, 제거해 낸다.
6.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신자와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온세계의 유일한 주군께서 명하신 산상설교와 그의 모든 명령과 가르침을 신실하게 지키며, 그 분의 걸음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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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神(God)이라는 원초적 신앙고백은 그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주관하시는 主(Lord)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의 신(a god)이 아니다. 특별히 고대인들이 익숙하게 고백했던 또 하나의 신으로써 예수를 고백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이러한 신관은 고대 사람들과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더구나 종교의 박람회요, 신들의 집합지였던 로마 사회에서 또 하나의 신(a god)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탄생 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뉴스가 아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神이면서 主라는 이중적 고백은 초대교회 신앙의 중요한 특징으로써 또 하나의 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방인들의 신앙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실제로 초대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요 주로 고백하는 것은 둘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육신과 영혼이 하나이듯, 하나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추상적인 고백으로 그쳐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정치적 영역, 경제적 영역, 문화적 영역, 가정생활, 직장생활 등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과 직결된 현실적인 문제였다.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영역에서 神이자 主이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의 주되심 (Lordship)이란 고백은 실로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로마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시킬 수 있었다. 특히 주되심의 고백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가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황제숭배 거부 행위였다.
정책적으로 로마 정부는 놀랄 만한 관용을 베풂으로써 당시 토착민들의 신들과 종교를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면 제국에 대한 충성을 전제였다. 이러한 조건이 있었음에도, 국가가 신민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기에 대부분의 제국의 신민들은 그 단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유대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유대인들의 공식적인 입장도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하지만 유독 초대교인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神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로마 제국의 호의마저 거절했다. 왜냐하면, 초대교인들에게 예수는 또 하나의 단순히 神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主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만이 神이시면서 로마 제국, 더 나아가 모든 나라의 王, 곧 황제이기도 하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초대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한다는 뜻은, 예수를 그들 나라의 왕으로 충성 맹세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것이 그들이 황제숭배를 단호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들은 신앙의 영역에서의 神과, 정치적 영역에서의 王을 분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종교와 국민의례도 분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여러 변화가 생기면서, 이러한 확고한 신앙은 점차 흐릿해졌다. 특별히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교회와 국가가 부적절하게 결합됨으로 주되심에 대한 고백은 점차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기독교가 박해의 대상에서 환영의 대상으로 바뀌면서 신앙의 정통성이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2 예수 그리스도 중심(Jesus Christ Centered)이라는 크리스천 정체성을 따라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것이 초대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원리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이것이 바로 사도적 신앙의 정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정수요, 기초이기에 우리의 모든 고백 또한 여기에 근거함을 밝힌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의 본 뿌리는 유대교이다. 그런데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가 분리되어 나오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이다.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건과 체험이 바로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가 분리되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다. 톰 라이트가 말한 대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육체의 부활을 목격한 뒤, 기존의 세계관을 폐기할만한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깨달음이다. 이것은 겉으로 볼 때, 토라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신앙이다. 왜냐하면 토라는 야훼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복음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들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자신의 스승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보내셨으며, 나아가 하나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진실 앞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도마가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고백하게 된 계기이다. 예수가 하나님 곁에 계셨던 말씀이자, 하나님 자신이며, 살을 입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요한 신학의 핵심이다.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이 신앙은 불가피하게 유대교와 분리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예전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간에게 예배를 드리는 종교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예배드리기 보다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웃으로, 친구로, 형제로 가까이 오신 친숙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함으로 저 멀리 계시며, 잘 알 수 없는 하나님을 보다 잘 예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초의 기독교 예배가 회당이 아니라, 식사의 자리, 곧 성찬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배는 기도, 찬송, 말씀 등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그들 곁에 현존하심을 기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神이시며, 그 분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고백이 복음서의 핵심 내용이고, 사도들 신앙의 핵심이며, 초대교회 예배의 기초였다. 그리고 이것이 후에 삼위일체 사상의 배아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시며,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이 고백은 세계와 우주, 그리고 역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위치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면서 여타의 모든 것은 탈중심화되었다. 로마 제국의 영광, 카이사르의 권세, 돈, 권력, 명성, 윤리, 전통, 관습, 체계, 철학, 심지어 구약의 전통마저 탈중심화되었다. 바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시며, 그 분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신앙 고백이 단순히 종교적 고백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앙의 고백과 현실 사이의 유기적 상관성은 구약 전통의 중요한 특징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한 결 같이 우상숭배 행위를 질타하며, 하나님 한 분만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소리높여 선포했는데, 그들의 이러한 선포에는 현실 생활에서의 급진적인 실천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늘 이러한 변화를 요구했다. 즉 풍요에 대한 높은 기대,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강박적 집착,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자기중심주의, 문명과 문화, 인간 업적에 대한 맹목적 선호 등은 단순한 가치관이나 문화관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행위였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구약의 전통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 받으시기 합당한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은 새로운 형태의 삶의 방식을 요청하는 엄청난 행위요 변화를 몰고 왔다. 이러한 고백,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고백은 두 번째 공동의 가치로 고백하게 될 제자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두 번째 공동의 가치를 다루기 전에 좀 더 점검해 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주가 되시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3 이러한 초대교회의 전통을 재발견한 사람들이 바로 아나뱁티스트들이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神일 뿐 아니라, 국가, 시, 경제, 문화, 예술 등의 영역에서도 主가 되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터가 두 왕국 이론을 통해서 신앙의 영역과 일반 삶의 영역을 분리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심지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장 칼뱅 역시도 신앙의 영역과 국가 등 일반 삶의 영역을 구분했고, 이러한 구분은 개혁교회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비록 개혁교회가 루터와 같은 이원론을 취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통치 방식은 각각의 영역마다 다르다는 '영역 주권' 사상은 개혁주의의 기본입장으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존 하워드 요더는 칼뱅의 그리스도의 절대 주권 사상을 타협 없이 신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을 선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지난 5백 년간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취한 일관된 입장이면서,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울림을 던지고 있는 급진적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하셨던 그 말씀을 순종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순종할 것이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폭력이나 전쟁, 원수사랑, 구제와 나눔, 섬김, 자족, 검소한 삶 등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모든 영역에서 준수해야할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돈이 맘몬이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과 삶을 지배해 버린 자본주의 경제를 향해서, 우리는 돈이 신이 아니라고 선포해야 한다. 스스로 최종심급인양, 모든 판단의 최종권위인양 거드름을 피우는 국민국가를 향해서, 우리는 그들이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해야 한다. 효율성이 미덕이고, 선이라고 믿는 기술사회를 향해서도, 우리는 효율성을 따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삶으로써 이를 증언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주님이시라는 고백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두 번째 가치인, 제자도로 연결될 것이다.
4 이것은 존 하워드 요더가 언급하였던 예수 정치학이 가지는 함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