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뱁티스트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남긴 일들
아나뱁티스트가 어떤 것인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나뱁티스트 신앙고백이나 사상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자랑하는 5백년 아나뱁티스트전통의 금자탑,
곧, 힘겨운 박해속에서 몸으로 체험하고 일구어낸
아나뱁티스트신앙고백과 사상을 탐구하는 것을 접기로 했다.
그 대신 내가 택한 길은 이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아나뱁티스트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했던가,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살피고자 한다.
이것은 그들이 한 일들을 취사선택하여
말끔히 가다듬어 정리해놓은
<후기의 작품>을 알아보는 일이 아니다.
미숙함과 허물이 고스란히 담겨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땅에 아나뱁티스트를 전한 이들의 생각들을 여과없이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진정성 있는 길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길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의문과 놀라움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의무, 의례 선교사들의 첫째가는 과제요
목표로 알려져 있는 본분을 잊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20개의 교회를 세우고도 남을, 그들이 머문 20년의 적지 않은 세월을
자신의 청춘을 송두리째 다 바친 헌신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이름을 새긴 교회 하나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 동족상잔의 미증유의 전쟁이 일어난 지난 50년대에 달려왔다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자생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수 많은 교회를 뒤로 두고, 선교사들은 조용히 물러갔다.
그들은 조용히 물러갔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 건물,
20년 헌신의 보람이요 승리의 증거인 <교회>하나 남기지 않고!
그들은 그것을 남겨두는 것을 잊고 떠났다.
과연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는가.
자신의 사명조차 잊은 극도의 건망증 환자요 건달들이었는가.
하지만 선교사들이 가장 큰 사명이요 목표로 여기는
가시적인 <교회> 하나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이땅의 생각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씨앗 하나 떨어뜨리고 갔다.
그들이 남긴 것은 <아나뱁티스트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이 떠난 뒤에 죽순처럼 굳은 땅을 뚫고 솟아난 것은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뱁티스트운동>의 씨앗들이었다.
구별하지 않는다 해도 리더 그룹이 있고, 신도와 비신자간에 일정한 구별이 있고
신앙고백문과 일정한 예배의식이 있는 깔끔한 제도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이 마음속 깊이 남겨두고 싶었던 것은 한 마디로 <제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처음교회에서 그들이 배웠던 것은 처음교회의 <교회제도>가 아니었음을,
그 회중들이 보여준 <처음교회의 삶>, <예수운동>이었음을
강력하게 몸으로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내 안에서는 그 선교사들이 말하는 소리가
우뢰처럼 귀창이 터지라고 울리고 있다.
“4세기 크리스텐돔 이후도, 그 이전의 처음교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가능한 한 제도의 떼가 묻지 않은 교회,
<예수운동>, 이것이 곧 <아나뱁티스트운동>이다...”
아무 데도 모셔져 있지 않은 예수,
그럼에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고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예수.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서로 하나되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
우상숭배가 아니다!
예수 안에서 서로 분신으로 하나되는 이 길에서
나와 내 가정과 세상은 변혁될 수 있다고 믿는 무리들,
그 끝을 모르며 아직도 변혁 중에 멈출 줄 모르는
이미 세워진 자신이 밟고 서 있는 주춧돌마저 들어내는
영원을 향해 도전하는 젊디젊은 아나뱁티스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아나뱁티스트가 어떤 것인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나뱁티스트 신앙고백이나 사상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자랑하는 5백년 아나뱁티스트전통의 금자탑,
곧, 힘겨운 박해속에서 몸으로 체험하고 일구어낸
아나뱁티스트신앙고백과 사상을 탐구하는 것을 접기로 했다.
그 대신 내가 택한 길은 이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아나뱁티스트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했던가,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살피고자 한다.
이것은 그들이 한 일들을 취사선택하여
말끔히 가다듬어 정리해놓은
<후기의 작품>을 알아보는 일이 아니다.
미숙함과 허물이 고스란히 담겨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땅에 아나뱁티스트를 전한 이들의 생각들을 여과없이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진정성 있는 길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길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의문과 놀라움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의무, 의례 선교사들의 첫째가는 과제요
목표로 알려져 있는 본분을 잊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20개의 교회를 세우고도 남을, 그들이 머문 20년의 적지 않은 세월을
자신의 청춘을 송두리째 다 바친 헌신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이름을 새긴 교회 하나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 동족상잔의 미증유의 전쟁이 일어난 지난 50년대에 달려왔다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자생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수 많은 교회를 뒤로 두고, 선교사들은 조용히 물러갔다.
그들은 조용히 물러갔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 건물,
20년 헌신의 보람이요 승리의 증거인 <교회>하나 남기지 않고!
그들은 그것을 남겨두는 것을 잊고 떠났다.
과연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는가.
자신의 사명조차 잊은 극도의 건망증 환자요 건달들이었는가.
하지만 선교사들이 가장 큰 사명이요 목표로 여기는
가시적인 <교회> 하나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이땅의 생각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씨앗 하나 떨어뜨리고 갔다.
그들이 남긴 것은 <아나뱁티스트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이 떠난 뒤에 죽순처럼 굳은 땅을 뚫고 솟아난 것은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뱁티스트운동>의 씨앗들이었다.
구별하지 않는다 해도 리더 그룹이 있고, 신도와 비신자간에 일정한 구별이 있고
신앙고백문과 일정한 예배의식이 있는 깔끔한 제도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이 마음속 깊이 남겨두고 싶었던 것은 한 마디로 <제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처음교회에서 그들이 배웠던 것은 처음교회의 <교회제도>가 아니었음을,
그 회중들이 보여준 <처음교회의 삶>, <예수운동>이었음을
강력하게 몸으로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내 안에서는 그 선교사들이 말하는 소리가
우뢰처럼 귀창이 터지라고 울리고 있다.
“4세기 크리스텐돔 이후도, 그 이전의 처음교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가능한 한 제도의 떼가 묻지 않은 교회,
<예수운동>, 이것이 곧 <아나뱁티스트운동>이다...”
아무 데도 모셔져 있지 않은 예수,
그럼에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고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예수.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서로 하나되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
우상숭배가 아니다!
예수 안에서 서로 분신으로 하나되는 이 길에서
나와 내 가정과 세상은 변혁될 수 있다고 믿는 무리들,
그 끝을 모르며 아직도 변혁 중에 멈출 줄 모르는
이미 세워진 자신이 밟고 서 있는 주춧돌마저 들어내는
영원을 향해 도전하는 젊디젊은 아나뱁티스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