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나그네

by 전영철 posted Nov 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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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때
그러니까 내가
처음으로 춘천 예수촌교회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명실공히
아나뱁티스트공동체의 나그네였다.
아나뱁티스트공동체에 대한 나의 정체성, 그것은 '나그네'였다.

그러나 지나다보니 내가 예수촌교회에
처음으로 글을 올렸던 때로부터
벌써 석달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춘천도 다녀오고
논산 양촌리도 들렸었다.
이래저래 아는 얼굴도 몇몇 생겼다.

서로 남남이던 서먹서먹하던 사람들이
어느 틈엔가 친근한 가족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변화되는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새삼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 자리에 와 있다.

우리말로 <나그네>란 말은 장소를 옮겨다니는 여행자를 뜻할 때는 영어로 지만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사회적 측면에서는 낯선 사람, 타자를 뜻하는 다.
stranger라 할 때에는 처음이나 시간이 많이 지난 때나, 낯선 타인임에 변함이 없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때나 늘 신선한 감각,
새로운 감동을 잃지 않는 삶을 살고싶어 했다.
그래서 감각이 둔해지고 생각이 굳어지는 것을 늘 경계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어느 분야에서든,
무엇인가의 전문가가 되는 것을 꺼려했다.
정통하는 한 가지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근본에 충실하는 어설픈 아마추어가 되고싶어했다.

대개 사람이 기세좋게 말을 해대는 때는 하룻강아지였을 때다.
조금만 지나서 전후좌우 사정을 알게 되면 벌렸던 입을 스스로 다물게 된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뿐 만이 아니다.
남남으로 확연히 구별되었던 관계의 벽이 느슨해지면서
모르는 사이에 서로 한 살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와 나는 하나인가 둘인가.
나는 그 경계의 어디쯤 와 있는가.
내가 서 있는 곳은 경계의 밖인가 안인가.

나는 이미, 아나뱁티스트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일정한 <거리>(distance)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가.
이미 그 <거리>를 잊어가거나 의도적으로 폐기해버렸는가.

나는 아나뱁티스트사람들, 처음교회사람들
무엇보다도 서로 하나되어 믿고 섬김을 옳게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 하나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나그네>(stranger)임을 벗어버릴 수 있는 날이 정녕 올 것인가.
나는 <나그네>임을 벗어버리도록 힘써야 하는 것일까.
동시에 그것은 오히려 잘 간직해야 하는 또 하나의 소중한 의무일까.

나는 <나그네>(stranger)인가.
<나그네>임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것이 끝나는 날, 나도 끝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