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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Discipleship 1)


 
*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 삶, 죽음과 부활을 따르는 총체적 삶의 변화로 지속적인 회심과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신성(Godship)과 왕권(kingship)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임을 믿는다. 2) 그리스도는 종교적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최고권위자이시다.3)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믿음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고, 그리스도 예배에 참여하며, 그 분께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을 말한다.4)  우리는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며 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이시면서, 우리가 충성을 바칠 유일한 왕이시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하나님 나라의 법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것을 뜻하며, 우리에게 명명백백하게 주어진 산상설교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및 부활의 모범을 뒤따른 것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임을 고백한다. 우리는 감히 자신들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성령님의 강권하심과 도우심을 힘입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와 주군으로 인정하고 모셔 들이도록 초청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법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의 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증거한다.



공동 헌신 Shared Commitment II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며, 총체적 삶의 변화로 지속적인 회심을 증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헌신한다.


1) 우리는 제자의 삶의 시작점인 중생과 회심을 위해 개인의 결단 및 변화를 요구한다.


2) 제자로 살기 위해 우리는 고난과 순종, 겸손, 희생의 본을 보이신 주님을 따라 높은 자리에 오르기보다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기를 기뻐하며 이를 실천한다.


3) 제자도는 먼저 은총과 사랑을 받은 자의 자발적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한다.


4) 우리는 믿음과 행위, 신앙과 윤리, 칭의와 성화가 하나로 통합된다고 믿고 통합적 삶의 방식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5) 우리는 제자의 도가 우리의 결단과 의지와 노력을 드려야 하지만, 결국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이룰 수 있는 도리임을 믿고, 늘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6) 제자의 삶을 위해서는 형제•자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도움을 요청하며 형제•자매의 도움을 받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 주


 1)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요 주되심이라는 첫 번째 공동의 가치인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부터 추론된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오해를 받고 있는 부분 중 하나이다. 지난 2000년 간 교회가 자주 범했던 오류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과 제자도(discipleship)가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쳐 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현재 한국교회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으며, 지난 500년 간 프로테스탄티즘이 한편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죄악의 열매들을 양산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게르하르트 로핑크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는 차등이 있다. 하나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부르심이다. 주님은 어떤 이들에게는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주시고, 때로는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용서를 선언하셨다. 조건 없이, 제한 없이 하나님의 은총과 선물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셨다. 이들은 주님께로부터 산상설교를 듣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초대를 받았다. 복음서를 보면 이러한 부르심은 무리를 향해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르심을 넘어서 제자들을 향하는 보다 특수한 부르심이 존재한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소수의 사람들을 구별하여 제자가 되어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셨다. 이 부르심은 지위의 변화와 존재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듣기만 할 뿐 아니라, 실제로 살아낼 것을 요구하는 부르심이다.
이 두 부르심은 둘이 아니요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마치 동심원의 원처럼 일반적 부르심은 보다 넓은 원을 이루고, 특수한 부르심은 그 원 안의 보다 좁은 원을 이룬다. 그런데 예수의 주된 관심은 제자들을 향하셨다. 특수한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는 이들을 자신의 사람들로 여기시며, 제자라고 부르셨다.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자신의 살과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때 제자들,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를 뺀 열 한 명과만 계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바로 이 식사의 자리에서 기독교 예배가 출현했으며, 이 계약에 기초하여 교회가 출현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일반적인 부르심을 받은 무리라기보다는 제자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를 준수하도록 기대되는 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라고 보았으며, 다시 신자들은 제자들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재침례교회는 ‘제자들의 교회(disciple's church)’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 보다 고상하고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들과 보다 열등하고 일반적인 소명을 받은 자들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을 거부한다. 즉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이층구조는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원칙상 교회에는 제자들로 부름받은 자들로만 모이며, 무리는 교회 밖에 존재하는 것이 옳다.
 
3)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악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인간을 건져주시는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께 우리의 충성과 사랑을 바쳐야 할 주군(主君)이시다. 이것이야 말로 사도들로부터 전해들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주군으로 섬긴다 함은 다른 어떤 것도 주군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포함한다. 우리 옛 말에도 있듯이 忠臣不事二君, 곧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으로,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며 다른 어떠한 것에도 충성하지 않는다.
충성이란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 표현된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임금의 어명에 절대복종하며, 신실한 신민은 나라의 법에 복종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백성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헌법에 복종한다. 바로 여기에 제자도가 위치한다. 제자도는 단순히 모범을 따르는 교육적 모델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주군께 충성을 다하는 정치적 모델에 기초해서 설명할 때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은 그분의 명령을 따름으로 판별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귀하신 주님께서는 독재자처럼 높은 곳에 군림하여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달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조건이 되시어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 모범은 산상설교를 말로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삶을 통해서 살아내셨다. 그리고 이러한 산상 설교적 삶은 십자가를 지시는 데에 이르러서 극치를 이루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의 법에 순복한다 함은 앞서 걸어가신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왕이시며, 선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을 뒤따라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고난, 순종, 겸손, 희생은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이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신민이 주군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먼저 주님의 은총과 사랑, 섬김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를 배신한 자를 용서하라고 명하신다. 주님께서는 원수되었던 우리에게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셨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원수에게 화해의 악수를 내밀라 명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인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우리 발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형제/자매의 발을 씻으라 명하신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받을 자격이 없는 형제/자매들에게 은총을 베풀라 명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굶었을 때 먹이시고, 병들었을때 고치시고, 헐벗었을 때 입히시고, 상처난 곳을 싸매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형제/자매를 먹이고, 고치고, 입히고, 싸매라고 명하신다. 이것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종에게 주인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요구다. 만일 우리가 염치를 안다면 우리가 주님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마땅한 도리요, 자랑할 일조차 못된다. 먼저 은총과 사랑을 받았기에 주님의 명령은 강제적인 명령이 아니요, 감사와 사랑으로 기꺼이 따를 만한 요구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며,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다.
 
4) 우리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으며, 기독교 신앙을 칭의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아울러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종교와 윤리의 구분,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사이의 균열 등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메노나이트 신앙고백은 “신앙, 윤리, 평화,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은 모두 ‘복음의 핵심’에 속한다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후브마이어 이래, 수많은 아나뱁티스트 신학자와 목회자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다고 가르쳐왔던 프로테스탄티즘의 가르침에 많은 의문을 제기해왔다. 믿는다함은 그리스도가 구주요, 주군이심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하신 구주(savior)시라는 사실만 믿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창조세계를 통치하시는 주군(Lord)이심을 믿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주군의 명령을 따름으로 그에게 충성을 보이는 것이 믿음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야고보가 잘 지적했듯이 올바른 믿음은 자신의 입술과 삶으로 충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따를 만한 능력이 없다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통찰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인간이 연약하고,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데 능력이 심히 부족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 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기로 결단할 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의지를 회복시키시고, 본성을 바꾸어 가신다는 사실도 아울러 믿는다. 물론 이것이 일회적 사건이거나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것은 종종 성화라고 표현되기도 했듯이 ‘과정’이요 ‘여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영이 끊임없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모든 국면이 새롭게 변화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자라간다는 사실을 믿는다.
더 나아가 우리는 형제, 자매 안에 거하시는 성령과 공동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권능을 신뢰하기에, 우리 개인이 연약하여 이루기 어려운 의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함으로 함께 완성해 갈 수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믿음은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순복하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으로서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함은 물론이고,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보편적 사랑의 법이다. 이 법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일차적으로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부인할 수 없이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졌으며, 그 온전하고 충만한 모습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나타났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산상설교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모범에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조율하고, 교정하며 결국은 모든 삶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열매로 그 진정성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산상설교와 십자가의 길로 명백히 드러난 제자의 도를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위선적인 넓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엄히 당부하셨던 좁은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대위임령이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을 온전히 지키는 제자의 도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믿으며, 예수 따름의 길을 증언하는 것이 올바른 복음 증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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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하다용해 2011.02.01 13:50
    이성하목사님의 글

    공동 가치 Shared Value II.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신성(Godship)과 왕권(kingship)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임을 믿는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문장을 부정문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긍정문으로 바꾸면 어떻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를 함께 담아낸다고 믿는다”
    만약에 본래의 표현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신다면 어색한 부분을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권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다.”혹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란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권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또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권이 서로 분리되지 않음으로써 완전하게 나타난다고 믿는다.”아니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권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임을 믿는다.”이거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권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 그리스도는 종교적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음… 좀 더 근본주의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신앙적으로가 어떨지…
    본래 근본없는 것들이 더 근본을 따지는 편이라서….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믿음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고, 그리스도 예배에 참여하며, 그 분께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을 말한다

    아~ 뭐랄까…신약을 전공한 직업병이랄까, …
    “복음서”라는 말보다는 신약성경이라고 하면 어떨지… 복음서에 위에서 말한 내용을 가르쳐주고는 있는 게 맞는데, 그걸 풀어내기가 만만치가 않은 일이라서…그냥 신약성경으로 하면 간단명료, 유쾌, 상쾌, 통쾌하지 않을까….


    ***3) 제자도는 먼저 은총과 사랑을 받은 자의 자발적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한다.

    이 표현은 “은총과 사랑을 먼저 받은 자의….”라고 하면 더 선명하지 않을까…요즘 고화질이 유행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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